제12화 난징 대학살 75주년을 맞으며

1937년 12월 13일, 인류 역사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은 사건이 벌어졌다. 중국을 침공한 일본의 군대가 난징(南京) 시내에 진입해 대학살극을 벌였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금까지 그 학살로 30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고 주장한다. 중국이 주장하는 숫자는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제국주의의 야욕에 빠져 있던 일본의 군대는 마치 경쟁이라도 벌이듯 무고한 난징 시민들을 죽이고 또 죽였다.

 

그 참혹함에 관한 여러 소식들은 이미 우리에게도 충분히 알려져 있는 상태다. 아무런 저항력도 갖추지 못한 난징 시민들을 대상으로 누가 먼저 많은 중국인의 목을 자를 수 있는가를 겨뤘다는 일본 군대의 야만적인 면모는 우리가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는 내용이다. 중국의 반응은 그 참화를 직접 겪은 사람들답게 철저하게 감정적이다. 아울러 일본의 지독한 야만성에 치를 떠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화권에서는 이를 다른 각도에서 제대로 살피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

 

홍콩의 한 언론이 난징학살 75주년을 기념하는 프로그램을 최근 선보였다. 전문가 연구 성과와 자료 분석을 통해 난징 대학살 사건의 이면, 나아가 그 참혹한 학살이 있었던 근본적 원인을 들여다보려는 취지였다. 그 내용은 이렇다. 우선 공격을 가했던 일본군의 문제는 차치하고, 그를 막는 방어군의 입장에서 문제를 살폈다. 당시 난징을 지키던 군대는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 군대였다. 중국을 이끌고 있던 국민당은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하자 그 대책 논의에 들어갔다. 1937년 11월 말이었다.

 

국민당 수뇌부, 특히 군의 고위 장성들 대부분은 난징을 사수(死守)한다는 데 회의적이었다. 지리적 여건으로 볼 때 난징이 결코 방어하기 좋은 곳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럼에도 한 사람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수도인 난징을 꼭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후난(湖南)의 군벌 출신 탕성즈(唐生智)였다. 장제스는 그에게 수도 난징의 사수를 맡긴 뒤 충칭(重慶)으로 철수했다. 일본의 진공 선두는 시시각각 난징을 향해 다가들던 때였다. 중국이 설치한 1차 저지선은 일찌감치 뚫렸고, 난징시 외곽의 주요 산을 연결한 2차 저지선도 쉽게 무너졌다.

 

명대에 쌓은 고성(古城)에 둘러싸인 난징은 직접적으로 일본군의 공세에 놓였다. 성벽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는가 싶더니 성은 곧 뚫렸다. 난징 위수군 사령관인 탕성즈가 장제스의 후퇴명령에 따라 먼저 성 뒷문으로 빠져 선박에 올라탄 뒤 사라진 게 커다란 화근이었다. 성벽을 사이에 두고 일본군과 접전을 벌이던 중국 군대는 홀연히 사라진 사령부 때문에 갈팡질팡하면서 후퇴를 해야 했다. 도망칠 구멍은 탕성즈가 이미 사라진 뒷문 너머의 장강(長江) 외에는 없었다. 한꺼번에 대규모의 후퇴병력이 몰린 뒷문, 그리고 탕성즈의 명령에 의해 전투 전에 이미 없앤 선박이 문제였다.

 

홍콩의 언론은 이 결정적인 패착을 장제스에게 돌리고 있다. 그가 내린 급한 후퇴명령서가 일본군의 대학살을 불러 들였다는 주장이다. 실제 늑대같이 달려든 일본군은 난징 시내에 진입한 뒤 인류 역사상 유례가 드문 학살극을 벌였다. 이는 정말 국민당 장제스만의 잘못일까. 많은 의문이 뒤따르는 대목이다.

 

이 언론은 그래도 용감한 편이다. 대학살을 벌인 일본군을 욕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내부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잘못과는 별도로 내부의 문제를 들여다보려는 자세는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한 법이다. 그럼에도 석연치는 않다. 국민당 수뇌부는 난징에서 충칭으로 후퇴하며 왜 난징성 안에 남아있던 그 수많은 시민들을 소개(疏開)하지 않았을까. 접전이 벌어진 뒤 장제스가 급히 후퇴명령을 내렸다면, 그 결과는 일본군에 의한 대량의 민간인 학살이라는 점이 불 보듯 뻔했는데도 명령을 내린 장제스와 그를 수행한 현지 사령관 탕성즈는 왜 그 점을 외면했을까.

 

이 점은 결과적으로 볼 때 국민당 장제스의 결정적인 잘못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한쪽으로 시비를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 중국에 전통적으로 흐르는 관본(官本)의 사고 유형 때문이다. 정부 또는 공무원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것, 따라서 모든 일에서 관(官)의 안전을 먼저 따져야 한다는 것, 그래서 백성의 민(民)은 부차적인 고려의 대상이라는 것.

 

이런 관 본위(本位)의 사고가 장제스의 후퇴명령과 그를 충실히 이행한 탕성즈의 행동궤적에는 짙게 녹아 있다. 이는 국민당만이 저지를 수 있는 과오가 아니다. 현재 중국을 다스리고 있는 중국의 국가경영 방식에도 어김없이 들어 있는 요소다. 따라서 홍콩의 언론은 더 깊숙이 들어가 이 문제를 짚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 결과는 어땠나. 성 뒷문으로 도망쳤으나 자신을 태울 선박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현실을 깨달은 국민당 군대는 자신보다 먼저 배에 오른 동료들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배를 빼앗기 위해서였다. 그런 교전으로 국민당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죽이는 참극을 연출했다. 결국 강을 건너지 못한 국민당의 수많은 병력은 살아남기 위해 민간인 복장으로 변장을 한 뒤 다시 성 안으로 들어왔다. 뛰어난 화력을 보유했으나 중국 군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인 일본군은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한 국민당 군대’를 어떻게 봤을까. 가뜩이나 호전적이며 야만적인 군대였던 제국주의 일본군은 이를 기회로 활용했을 것이다. 야수(野獸)나 다름없는 그런 일본의 군대에게 이는 거침없이 중국인을 죽일 수 있는 명분으로 작용했을 법하다.

 

난징 대학살 75주년인 지난 12월 13일에는 중국의 해상 감시선 4척과 공중 감시기가 일본과 마찰을 빚고 있는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열도에 진입해 일본 공군기가 급히 발진하는 사건이 있었다. 본격적인 국면은 아니지만, 조금씩 동북아의 상공에 무력 충돌의 조짐이 모여든다.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편안해지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이 국가경영의 요체다. 그러려면 전쟁은 피하며 각기 발전을 이뤄야 하는데 동북아의 정세는 자꾸 반대로 향하는 분위기다. 게다가 북한이 대륙 간 탄도 미사일을 쏠 수 있는 로켓 발사에 성공했으니, 그 분위기가 훨씬 을씨년스럽다. 이게 바로 격랑(激浪)임이 분명한데, 대한민국호는 정말 순항하는 것일까.

2012-12-14 14:2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