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한자(漢字)의 오남용, 약물 오남용만큼 만만찮다

한 일간지가 올해의 ‘말말말’을 뽑아 소개한 기사를 읽었다. 박근혜 새 당선자의 경우 19대 총선을 앞두고 “갈 길은 먼데 해는 저물고”라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안철수 전 후보는 대선에 임하면서 “건너온 다리를 불살랐다”고 했단다.

 

박 당선자의 말은 유래가 있다. 한자로 옮겨 적으면 ‘일모도원(日暮途遠)’이다. 춘추시대 초(楚)나라 오자서(伍子胥)에 관한 일화에서 나왔다. 초나라 평왕(平王)이 자신의 부친을 살해하자 오(吳)나라로 도망을 쳐서 합려(闔閭)를 도와 오나라 정권을 잡은 뒤 다시 초나라를 쳤던 과정이다. 부친의 원수를 갚으려 이미 작고한 초나라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에다 매질을 함으로써 분풀이를 했던 오자서에게 누군가가 “너무 심한 일을 저지르고 있다”고 충고하자, 오자서는 “갈 길은 먼데 해가 지는 급한 상황이라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안철수 전 후보의 “건너온 다리를 불살랐다”는 중국의 성어 ‘과하탁교(過河拆橋)’를 떠올리게 한다. 이미 건넌 다리를 거꾸로 건너지는 않겠다는, 앞서 정한 대로 갈 길을 가겠다는 안 전 후보의 의지를 표현한 말이었다. 중국 성어 ‘과하탁교’는 전통적인 문인 관료를 뽑는 제도인 ‘과거(科擧)’와 관련이 있다. 몽골의 원(元)나라 때 이미 과거로 벼슬길에 들어섰던 관료가 과거제도를 폐지하자는 의견을 내놓자, “자신이 건너온 다리를 없애 남이 넘어올 수 없게 한다”는 평이 나왔다는 것이다. 안철수 전 후보의 경우 “건너온 다리를 불살랐다”는 표현을 통해 정치인으로서 꾸준하게 앞만 보며 활동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중국식 성어 표현에 나름대로의 뜻을 가미해 달리 쓴 셈이다.

 

한자는 이렇게 우리 생활에 매우 가까이 있는 문자 체계다. 비록 중국 대륙에서 싹을 틔우고 독특한 의미체계를 구축했으나 한자문화에 익숙한 한반도 사람들은 그를 나름대로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박근혜 당선자나 안철수 전 후보의 출사표(出師表)식의 언어에서도 이런 흔적이 잘 드러나고 있다. 문제는 잘못 쓰는 오용(誤用)이다. 박근혜 당선자와 안철수 전 후보의 응용(應用)은 한자 의미체계의 적절한 활용이라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이다. 그러나 의미 자체를 잘 알지 못하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한자를 아무 데나 끌어와 쓰는 현상이 많아진다. 이를 우리는 ‘오남용(誤濫用)’이라고 부르는데, 약품에만 이런 오남용이 있는 게 아니다.

 

최근 눈에 띈 큰 오남용의 사례가 ‘대첩(大捷)’이다. 박근혜와 문재인은 12월 대선 선거전 막바지에 같은 날 비슷한 시각, 광화문에 모여 선거운동을 펼쳤다. 언론 매체들은 이를 앞 다퉈 ‘광화문 대첩’이라고 표현했다. 주류 신문이나 방송 등도 예외가 없었다. 선거의 결과가 나오기 전, 그리고 양측의 광화문 선거운동이 펼쳐지기도 전에 ‘대첩’이라는 표현을 쓰고 말았다.

 

대첩은 ‘커다란 승리’, ‘대승(大勝)’을 뜻하는 한자어다. 이 오류에 대해서는 <서울경제>의 한 기자가 25일 신문에서 지적을 하는 정도에 그쳤다. 나머지 주요 언론들은 이 오류에 대해 반성의 조짐조차 없다. 대선 결과가 나온 이후에도 여의도에서 ‘솔로 대첩’이 있었다. 미혼의 남녀들이 여의도 공원에서 서로 만나 단체 미팅을 한다는 내용의 이 행사가 어떻게 ‘대첩’이라는 표현을 얻는지 도대체 궁금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 행사가 열리기 전, 그리고 참담한 흥행 실패로 결과가 나온 뒤에도 한국의 대다수 언론들은 ‘솔로 대첩’이라는 표현을 고치지 않았다.

 

‘첩(捷)’이라는 한자는 초기의 사전적 의미가 ‘군사적으로 얻어 들이는 것’, ‘군사적인 수확’, ‘사냥에서의 획득’이다. 이어서 전쟁에서 거두는 승리라는 뜻으로 발전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빠르다’의 뜻을 얻었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거둔 큰 승리라는 ‘대첩’이라는 단어가 생겼고, 승전보(勝戰譜)를 뜻하는 단어 ‘첩보(捷報)’도 생겨났다. ‘빠르다’는 의미는 우리가 흔히 쓰는 ‘지름길’이라는 뜻의 ‘첩경(捷徑)’이라는 단어도 낳았다. 아울러 세계 최고의 명차인 ‘포르쉐’의 중국식 이름은 ‘바오스제(保時捷)’이다. 이 한자 이름은 원래의 음을 소리 나는 대로 적은 음역(音譯)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시간을 벌어주는 빠른 차’라는 뜻을 담고 있다.

 

박근혜 vs 문재인의 광화문 선거전은 ‘대첩’이 아니라 ‘대전(大戰)’, ‘결전(決戰)’ 등으로 적는 게 옳았고, ‘솔로 대첩’은 한자어 대신 ‘솔로 큰 모임’ 정도로 소박하게 쓰는 게 옳았다. 원래 잘 모르는 길은 함부로 나서는 법이 아니다. 그런 말을 기획 단계에서 쓰는 행위 주체자들의 지적인 경량감은 차치하더라도, 그를 대서특필(大書特筆)하는 이 시대 한국 언론의 가벼움을 도대체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까.

2012-12-27 13:45: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