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글 꼬투리-한자의 오용, 그리고 남용

2013년 1월 2일자 <조선일보>를 보다가 마주친 오류다. 본 섹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는 칼럼 면이었다. 주용중 기자가 쓴 ‘박근혜 vs 박정희’라는 제목이 우선 눈에 띄었다.

 

박근혜 당선자가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치적 유산을 어떻게 계승해서 발전시키고, 변화한 시대에 맞춰 어느 만큼의 다른 대응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주문이 글의 주요 내용이다. 그런 취지에 맞추기 위해 칼럼 작성자는 ‘승화(昇華)’라는 단어를 썼다. 박근혜 당선자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겼던 업적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는 뜻에서다. ‘승화’라는 단어는 그런 의미에서 적절하다. 지금 수준에서 한 걸음 더 올라(昇), 빛나는 결과(華)에 도달한다는 새김을 지닌 단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주용중 칼럼 작성자가 본문에서, 그리고 본인 또는 논설위원실에서 달았을 제목을 통해 ‘발전적 승화’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발전적 승화’가 있다면 ‘퇴보적’이거나 ‘부정적’인 승화가 별도로 있다는 얘기다. 승화라는 단어 자체를 두고 보면 ‘발전적 승화’는 군더더기 표현이다. 승화 자체가 ‘나아짐’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유명 신문의 유능한 기자가 그런 말뜻을 제대로 몰랐다고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승화라는 한자 단어에 대한 이해는 철저하지 않다는 혐의를 주기에 충분하다. 문장 흐름에 얹고자 깊이 생각지 않고 넘어가는 과정에서 ‘아차’하는 실수로 적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이를 칼럼의 작은 제목으로 뽑아낸 점에서는 그런 의심이 매우 짙어진다. 신문이 생산해 내는 많은 글 중에서 칼럼과 사설을 다루는 논설실의 글은 백미에 해당한다. 그만큼 수준이 높은 글로써 세상 많은 일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는 신문사의 핵심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초고 수준, 나아가 완고(完稿)를 내보내는 과정, 그리고 이를 편집하는 대목, 종국에는 최종 인쇄 직전의 대장을 검토하는 시간에서도 ‘발전적 승화’가 걸러지지 않았다는 대목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1등 신문을 자부하는 조선일보가 보인 한자 단어의 오용이다.

 

내친 김에 중앙일보의 ‘송호근 칼럼’ 최신 편을 들여다봤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인 송호근 씨의 칼럼 문장은 화려체다. 표현이 거창해서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곱게 보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다. 중앙일보 1월 1일자에 그의 칼럼이 실렸다. 제목은 ‘해무’. 바다에 끼는 안개인 해무를 통해 새해 첫날 박근혜 당선자에 대한 기대를 풀어간 글이다. 그러나 송호근 칼럼 저자의 붓을 잡는 악필(握筆)의 악력(握力)은 역시 강했다. 요즘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니 악력보다는 타력(打力)이 너무 셌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런 점 때문에 그의 문장은 절제(節制)보다는 과잉(過剩)의 인상을 준다.

 

‘한반도 상공을 가득 메운 저 지독한 해무’라는 표현은 바다에 낀 안개, 해무라는 글 소재를 글 여러 구석으로 가져가다가 생긴 오류다. 한반도 상공이면 이미 해역(海域)이 아니다. 그래서 그 상공에 끼어 있다고 설명하는 저자의 주장 속 ‘안개’는 해무라고 할 수 없는 셈이다. ‘단호한’이라는 표현도 자주 등장한다. 화려체를 구사하다 보면 어감(語感)이 자연스레 강해지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단호한 결단’을 남용해서는 곤란하다. ‘단호(斷乎)’와 ‘결단(決斷)’에 모두 끊는다는 새김의 ‘단(斷)’이 들어가 있다. 결단 자체가 확실하게 끊고 맺는 행위다. 굳이 ‘단호’라는 표현을 앞에 세울 필요가 없다. 역시 과잉이다.

 

‘장막 뒤에서 느긋하게 방관해 온 민주노총’도 눈에 거슬린다. 방관(傍觀)은 옆에서 지켜보는 행위다. 그런 한자 새김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장막 뒤’라는 표현을 붙일 수 없다. 그저 일반인의 한자 단어 사용이라면 모를까, 유수 신문의 유명한 칼럼에서 이런 표현을 자주 접한다는 게 과연 어떤 의미일까. 뒷부분의 ‘바닥경기를 부양하는 불쏘시개라도 있어야’라는 표현도 문제다. 바닥 경기를 ‘부양(浮揚)’하는 것은 연료(燃料)가 아니다. ‘부양’은 들어 올리는 일이다. 그런 부양작업에 ‘불쏘시개’라니? 그렇다면 앞의 표현을 조절해 ‘바닥경기를 지피는 불쏘시개’라고 해야 옳지 않은가.

 

여의도에서 벌어진 ‘솔로’들의 큰 모임을 버젓이 ‘커다란 승리’라는 의미의 ‘대첩(大捷)’이라고 이야기하며,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지난해 12월 광화문 막바지 유세를 두고 ‘광화문 대첩’이라는 문패를 다는 게 우리의 수준이다. 그런 명료하지 못한 문자 의식으로 사물과 현상을 보는 게 오늘날의 우리들이다.

 

한국 사회의 문자 생활을 선두에서 이끌고 있는 신문의 책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유명 칼럼, 신문의 간판으로 내거는 칼럼 등에서 이런 오용(誤用)과 남용(濫用)이 자주 드러나고 있으니 문제의 뿌리는 매우 깊은 곳까지 들어가 있는가 보다.

2013-01-03 15:1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