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영화감독 리안과 장이모우

리안(李安)이 또 아카데미 감독상(작품 <라이프 오브 파이>)을 수상했다. 동양인으로서는 한 차례 수상하기도 어려운 일인데, 그는 당당히 다시 한 번 영예의 감독상을 받았다. 그의 저력은 어디서 나오나.

 

우리에게는 영화 <음식남녀(飮食男女)>와 <색·계(色·戒)>로 너무 잘 알려진 인물이다. 201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그의 이름은 다시 찬란하게 떠올랐다. 세계적인 영화 시상식에서 두 차례에 걸쳐 감독상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롭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그는 ‘경계인’이다. 고정적인 틀에 안주하지 않으며 틀과 틀 사이를 오가며 궁극적인 사람의 가치를 탐구하는 사람이다. 고정적이며, 따라서 때로는 편견적일 수 있는 사회의 굳어진 관념을 벗어나 자유롭게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에 눈길을 주는 타입의 감독이다.

 

대만에서 태어났으나 대륙으로부터 이민한 가정의 후손, 아울러 대학입시에서 두 번 낙방한 뒤 결국 미국행의 여로(旅路)에 들어서 미국 속의 대만인, 또는 미국 속의 중국계로 생활했다. 중국과 대만, 미국에서 그는 공교롭게도 모두 주변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주류(主流) 사회의 안온함을 거부하거나 탈피했고, 그곳에 단단히 정착해 풍요와 안정이 주는 단맛에 빠지려 하지도 않았다. 그의 여로는 영화에 입문하면서도 닫히지 않았다. 자신의 출생과 핏줄이 가져다 준 간접적인 역사 경험, 그리고 미국이라는 거대 국가질서 속에서 진실과 자유를 향해 몸부림치는 인간 군상(群像)에 주목했다.

 

3000년 이상의 중국 봉건적 왕조사회가 해체되면서 맞이한 중국 근현대사의 혼란, 국민당과 공산당이 오랜 기간 벌인 내전의 어두운 그늘이 그에게는 중요한 사고(思考)의 광맥을 제공했다. 아울러 대만으로 쫓겨 온 대륙계 사람들의 고독과 번민, 욕망과 좌절도 그의 작품 속에는 분명히 녹아 있다. 미국에 이민한 ‘주변인’으로서의 경험도 그에 못지않다. 세계적인 패권을 유지하는 미국사회에서 종국적으로 인간이 탐색하며 구현해야 할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를 늘 물어왔다. 그래서 그는 방랑자다. 구태의연한 틀에 머물지 않고 시간 속을 넘나들며 좀 더 소중한 가치에 눈을 돌리는 방랑자였다.

 

리안에 비해 돈을 더 벌었고, 부분적인 명성에 있어서는 더 잘 나가는 중국 감독이 있다.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장이모우(張藝謀)다. 그는 <낡은 우물>, <붉은 수수밭>으로 국제 영화무대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인물이다. 아울러 근간에는 이연걸이 주연한 <영웅> 등을 선보여 뚜렷하게 자리매김을 한 감독이다.

 

장이모우는 그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폐회식 무대 총감독을 맡았고, 거대한 무대장치를 동반하는 오페라 <투란도트(Turandot)>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가 벌어들인 돈과 얻은 명예는 이번에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리안에 비해 나으면 나았지,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장이모우는 주변을 돌며 경계를 오가는 지식인 또는 예술인은 아니다. 중화민족주의라는 중국 중심의 이데올로기를 작품 속에 냉큼 섞었으며, 중국이 지향하는 국가적 가치관을 영화라는 예술 형식에 충실히 실은 인물이다. 중국이 잘못이라는 지적은 아니다. 단지 예술적인 영혼이 국가주의에 함몰할 경우 예술적인 상상력과 생명력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작품이 추구하는 가치와 진정성으로 볼 때 장이모우는 이제 리안의 상대가 아니다. 리안은 주변을 돌면서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가로서의 자세를 유지했고, 장이모우는 중국이라는 틀에 안주하며 돈과 명성을 좇는 영화감독이라는 평을 듣는다.

 

장기와 바둑, 마작을 둘 때 그 게임판을 중국에서는 국(局)으로 적는다. 그 게임판의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로, 상대와 승부를 겨루는 사람을 당국자(當局者)로 적는다. 그 게임에 몰두한 사람은 제가 종국적으로 가야 할 방향을 잃는 경우가 있다. 중국의 성어로는 ‘당국자미(當局者迷)’다. 그 게임에 스스로의 심신(心身)을 가두지 않고 자유롭게 지켜보는 사람이 방관자(傍觀者)다. 이 사람은 게임의 이해로부터 떠나 있어 맑고 깨끗한 눈으로 세상을 들여다본다. 그래서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눈은 깨끗하다는 의미로 ‘방관자청(傍觀者淸)’으로 적는다.

 

둘을 이어 쓰는 성어가 ‘당국자미, 방관자청’이다. 예술가는 그런 자세로 세상을 봐야하지 않을까. 주변을 떠돌며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와 진지함, 그리고 솔직함과 담백함으로 아카데미의 감독상을 다시 한 번 움켜쥔 리안 감독을 상찬하고 싶다. 그런 자세가 어찌 예술가만의 일일까. 배우고, 때로 익혀 세상을 제대로 보려는 마음가짐 있는 이 모두가 갖춰야 하는 덕목이 아닐 수 없다.

2013-02-27 16:1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