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막다른 길에 몰린 것은 개일까, 쥐일까

요즘 북한이 심상치 않다. 20대 후반의 김정은이라는 친구가 전선을 마구 쏘다니며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시늉을 내기에 바쁘다. 얼마 전에 핵실험까지 강행한데다가, 이제는 공공연히 대한민국을 향해 전쟁의지까지 드러내고 있으니 불안하지 않을 수도 없다.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저들의 도발로 인해 입을 피해가 두려울 뿐, 국가의 소멸을 걱정하지 않는다. 북한은 도발과 함께 자신의 권력, 내지는 ‘공산당 왕조 북한’이라는 존재 자체의 절멸(絶滅)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기에 저렇게 용을 쓰는가.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북한을 생각해 보는 게 요즘이다. 아무래도 북한은 점차 궁지로 몰리는 분위기다. 한국과 미국의 동맹은 김정은의 버르장머리 없는 그런 협박에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문제는 북한의 맹방이었던 중국이다. 13억의 대륙은 요즘 분위기가 다르다.

 

북한을 옹호하고 두둔하는 모습이 급속히 줄어든다. 아니, 일반 대중들은 정말 뿔이 난 기색이다. 네티즌을 중심으로 “말썽만 부리는 북한은 우리가 보호할 나라가 아니다”라는 말이 부쩍 자주 등장한다. ‘북한을 버려야 한다’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사람들의 행렬도 이어진다. 돌이켜 보면, 북한을 보는 중국 당국과 민간의 시선은 꽤 달랐다. 중국 당국은 아무래도 전략적인 시선이었다. 자국의 경제발전을 위한 주변 환경의 안정, 그리고 대만과 맞바꿀 수도 있는 북한의 전략적 효용성, 미군의 압록강 접근을 막아주는 천연적이며 이념적 장벽으로서의 북한이 지니는 가치에 주목했다.

 

그러나 민간은 다르다. 베이징이나 상하이 등 중국 대도시에서 택시를 탄 뒤 운전사와 대화를 나눠보면 그런 분위기는 금세 읽힌다. 중국 민간이 북한을 보는 정서는 미국영어 한 마디로, “갓댐~”이다. 왜 그런가. 자신의 처지, 자신의 눈높이, 자신의 감성으로 볼 때 ‘제 백성 굶겨 죽이는 놈은 진짜 나쁜 놈’이라는 마음속 짙은 감성의 축적 때문이다.

 

과거 중국은 어땠나. 봉건왕조 시절의 누구나 배고팠던 시절은 여기서 생략하자. 1959년의 대약진 운동, 1966년부터 10년 동안 벌어진 문화대혁명은 중국인에게는 피눈물이 쏟아지는 세월이었다. 대약진 운동 뒤 몇 년 사이에 굶어 죽은 사람만 3,000만 명에 달한다. 굶주림과 가난, 그리고 가족과의 사별 또는 생이별은 중국인에게는 매우 깊은 상처, 중국어로 적으면 상흔(傷痕)이다. 역사 속의 풍경은 달리 말할 것도 없다. 민간에서 전승해 내려오는 유명한 구절 하나로 그 구구한 설명을 대체하겠다.

 

“태평 시절의 개로 살지언정, 난세의 사람으로는 살고 싶지 않다(寧爲太平狗, 不做亂世人).”

 

일종의 선언처럼 들리는 이 말의 울림을 이해하는가. 중국인은 전쟁과 재난의 길고 긴 터널을 걸어온 사람들이다. 그 수도 없이 많이 행해진 폭력과 억압, 핏빛 상쟁(相爭)의 여행길에서 그들은 결국 난세의 사람보다는 태평시절의 개가 오히려 나을 것이라는 절규를 뿜어낸 것이다. 그런 중국인이 현대에도 버젓이 왕조를 유지하면서 수많은 백성을 굶겨 죽이며, 정치적 폭력을 행하는 북한의 통치자에게 어떤 감정을 지닐까. 그런 정서에 20대 후반의 젊지만 버르장머리 없어 보이는 김정은이 핵폭탄을 안겼으니, 중국 민간의 심사는 ‘부글부글’ 거품을 올리다가 마침내 비등점에 닿은 형국이다.

 

그런 민간의 정서에다가 국제적 정치 환경, 자국의 이익에 대한 엄밀한 타산을 거쳐 북한의 맹방임을 자처했던 중국 당국마저 흔들릴 기미다. 압박이 점차 도를 더하고, 제재의 틀이 현장법사의 주문에 의해 손오공의 이마에 올라간 쇠덫이 점차 조여드는 것과 같은 마당이다.

 

북한의 큰소리 협박에는 강한 위기감이 배어 있다.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그런 북한을 더 몰아칠까 어쩔까 고민 중이다. 북한이 이제는 철없는 지도자 김정은과 일부 강경파에 의해 막다른 길을 선택한 듯 보인다. 저들은 쥐일까, 강아지일까. 그래서 그런 형용을 동양사회의 기준으로 찾아봤다. 역시 ‘궁지(窮地)에 몰린 쥐는 고양이까지 문다’다. 우리말처럼 쓰이지만, 원래는 일본식 속담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는 ‘강아지가 (막다른 길에) 몰리면 담장에 뛰어 오른다’고 해서 ‘狗急跳墻’이라고 적는다. 개와 함께 견주는 고양이까지 등장해 ‘급해진 고양이 방에 뛰어든다’는 말도 있어, 한자로는 ‘猫急上房’이라고 표기한다. ‘위험한 지경에 몰린 맹수는 싸우려 든다’는 ‘獸困猶鬪’도 있고, ‘막판의 한 수를 던진다’는 의미의 ‘고주일척(孤注一擲)’이라는 성어도 나온다.

 

이제 한반도는 그런 상황에 접어든 느낌이다. 북한의 도발이야 강력한 무력으로 제압하면 그만이지만, 그 어디로 튈 수 없는 성향에 대해서는 아주 세심하며 치밀한 대비가 필요하다. 그러기에 살펴야 한다. 김정은이 이끄는 노동당의 무뢰배들은 강아지 상(相)일까, 고양이 상일까, 아니면 쥐에 불과할까, 그래도 종국에는 결기를 부리는 맹수일까. 우리는 어느덧 그런 지경까지 와버렸다.

2013-03-15 16: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