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무대에 오른 시진핑 관찰기_1

지난해 11월 15일 모습을 드러낸 중국 지도부는 시진핑(習近平)이 핵심을 이룬다. 그와 함께 중국 권력 정상에 올라선 나머지 6인의 면면 또한 중요하지만, 지도부의 의사결정구조에서는 시진핑의 몫이 그야말로 결정적이다. 그는 공산당 18차 당 대회 폐막 뒤 신임 지도부를 이끌고 무대에 올라와 행한 첫 연설에서 “중화민족의 부흥”이라는 말을 모두(冒頭)에 실어 던짐으로써 신임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등장을 관심 있게 지켜본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논리적인 맥락에서 보면, 그가 던진 “중화민족의 부흥”이라는 메시지는 크게 문제될 구석이 없다. 중국은 마오쩌둥(毛澤東) 시기의 건국 및 과격한 사회주의 실험,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이라는 일대 전환(轉換), 장쩌민(江澤民)-후진타오(胡錦濤)의 고속성장시대를 걸어왔다. 각자 구심점이 있었다. 마오 시대의 혁명적 열기, 덩 시대의 전환, 장-후 시대의 경제성장은 다양하면서도 이질적인 중국의 각 지역 사회를 한 묶음으로 만드는 데 필요했던 ‘이데올로기’였다. 그 다음을 묶어줄 시진핑 시대의 이데올로기적인 ‘끈’은 무엇일까.

 

해외의 많은 관측통들은 장-후 시대에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 중국식 민족주의에 주목해왔다. 이 시기에 쌓은 고속성장의 열매는 빛 못지않게 그늘 또한 짙게 남겼다. 덩샤오핑 이래로 이어져 온 불균형 성장의 덫이 심각한 빈부격차, 공무원 부패, 환경오염, 부동산 등 자산의 거품 현상, 국유기업 주도로 인한 민영기업의 쇠퇴 등 숱한 문제로 남은 것이다. 장-후 시대 20년 동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성장이 사회를 이끄는 이데올로기였으나, 이제는 그 효용이 한계에 봉착한 상황이다. 공산당의 속성상 이를 열어갈 향후 10년간의 새 이데올로기는 ‘중화민족주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해외 관측통들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아니나 다를까. 시진핑은 공산당 총서기 취임 직후의 첫 연설에서 많은 지향을 선보였으나 결국 첫 부분에서 ‘중화민족의 부흥’을 역설했다. 매우 강한 열망이 담긴 레토릭이었으며, 그 뒤에 열거한 여러 차례의 강조 요법을 볼 때도 시진핑을 비롯한 신임 5세대 지도부의 지향(志向)은 확고하면서도 매우 강렬했다. 신임 지도부가 무대 전면에 등장했을 때 그들이 어느 곳을 찾아 무슨 일을 하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특히 공개적이면서 비교적 투명한 의사결정구조를 보이는 서방국가와는 달리 내부의 의사결정구조가 흑막 속에 가려진 사회주의 국가에서 지도자가 특정한 일정에 따라 움직이는 동선은 많은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시진핑에 앞서 등장한 후진타오는 공산당 총서기 취임 뒤 사회주의 중국의 혁명 성지인 시바이포(西柏坡)를 찾아갔다. 그 뒤 후진타오의 집권 10년은 경제의 고속성장 뒤켠에 처진 사람들을 배려하는 ‘조화로운 사회(和諧發展)’로 이어졌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에 비해 시진핑은 취임 뒤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적인 지역인 광둥(廣東)의 1호 경제특구 선전(深圳)을 찾아 롄화산(蓮花山)에 우뚝 서 있는 덩샤오핑의 거대 동상을 참배했다. 신임 지도부의 지향이 덩샤오핑의 유지를 받든 지속적 개혁개방임을 분명히 한 행동이다. 선전의 덩샤오핑 동상 참배, 그리고 그에 앞서 선보인 당 총서기 취임 연설을 한데 엮어서 보자면 시진핑이라는 5세대 지도부의 ‘핵심’이 무엇을 구상하지에 관한 짐작이 가능해진다. 그는 지난 30여 년 동안 이어져 온 개혁개방의 맥락 위에 다시 ‘중화민족 부흥’이라는 덧칠을 가하는 역할자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중국은 주지하다시피 공산당 일당전제(一黨專制)의 시스템이다. 모든 것을 당이 이끌고, 당이 해결한다. 관심도 필요 없으며, 간섭은 일절 금물이다. 지시한 방향 그대로 따라오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그런 공산당의 총론(總論)은 당의 헌법에 해당하는 당장(黨章)에 잘 드러나 있다. 그 당장의 토대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 장쩌민 3개 대표, 후진타오 과학발전관’이다. 앞부분이야 이해 못할 게 없다. 뒷부분의 ‘장쩌민 3개 대표’는 자산가 그룹의 공산당 입당 허용 등을 내세운 지향이고, 후진타오 과학발전관은 개혁개방의 후유증을 잠재우기 위해 선보였던 가이드라인이다. 이는 8200만 명의 당원과 나머지 약 12억여 명의 중국인을 이끄는 공산당의 단단한 골조(骨組)에 해당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개혁개방의 여파로 이제는 그냥 상징에 불과하지만, 마오쩌둥 사상과 덩샤오핑 이론은 골간(骨幹)에 해당한다.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그런 골조에 조금의 장치와 색깔을 얹은 상태에 불과하다.

 

향후 10년 뒤 시진핑이 자신의 집권기간을 마무리하면서 그에 무엇을 보탤지는 더 두고 봐야 한다. 그러나 당 총서기 취임 연설과 그 직후에 보인 행보를 보면 그의 일차적인 지향은 비교적 뚜렷해졌다. 중화민족 부흥이라는 사회 통합적인 틀을 덩샤오핑이 보였던 실사구시(實事求是)적 실용주의로 채워 향후 10년 동안 중국을 이끌어보겠다는 구상이다. 마침 2013년 1월 5일 시진핑은 수도 베이징(北京)의 공산당 고위 간부 300명을 대상으로 일장(一場)의 연설을 다시 선보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 “개혁개방 전후의 역사는 서로 부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혁개방 전의 마오쩌둥이 보였던 혁명기의 열정, 개혁개방 뒤 덩샤오핑이 보였던 실용적 경제성장의 두 역사시기를 한 데 엮는 내용의 연설이었다. 그는 두 시기를 “우리 당이 인민들을 이끌고 ‘사회주의 건설’을 이뤄가는 실천과 탐색의 기간”이었다고 회고했다.

 

결론적으로 보면, 시진핑은 마오쩌둥의 과격한 혁명주의적 실험과 덩샤오핑의 실용적 개혁개방을 통합해 인식한 모양새다. 아울러 장쩌민과 후진타오가 얹은 ‘철골 골조 상의 부가물(附加物)’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마오쩌둥의 과격한 좌파적 혁명주의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라는 ‘핵심’ 골조에 자신의 집권 성과를 직접 얹겠다는 의지 표명으로 들렸다. 일당전제의 틀을 유지하고 있는 공산당의 차세대 집권자로 시진핑이 선보인 논리적인 전개 능력은 크게 나무랄 데가 없다. 전임 공산당 1, 2세대 지도부의 정치적 명맥을 훌륭히 계승하겠다는 게 전혀 낯설지 않다. 공산당은 후임자가 전임자의 공적을 충분히 이어가면서 새로운 발전을 지속적으로 모색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임자의 빛을 계승하되 그가 남긴 그늘을 함께 살펴보는 자세와는 다르다. 덩샤오핑은 대약진운동(1959년)과 문화대혁명(1966~1976년) 등 마오쩌둥이 남긴 ‘그늘’을 충분하게 살핀 인물이다. 따라서 마오쩌둥이 사망한 뒤 권력을 잡았던 덩샤오핑은 마오를 평가하면서 “공(功)은 7, 과(過)는 3”이라는 인식을 선보였다. 덩샤오핑은 마오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그런 평가를 했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마오가 남겼던 그늘을 대부분 청산하면서 중국을 개혁개방의 대 전환으로 이끌었다. 마오 시대가 보였던 혁명적 이상주의, 과격한 좌파적 실험주의가 중국에 몰고 왔던 부정적인 영향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그에 대응한 결과다.

 

시진핑은 그런 점이 부족해 보인다. 적어도 그는 마오의 과격한 이념성이 지닌 오류, 덩샤오핑의 지나친 실용주의적 성향이 남긴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지도자는 아니라는 인상을 준다는 얘기다. 마오에 못지않게 덩샤오핑이 남긴 문제도 간단치 않다. “노란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다”는 식의 사고를 지닌 덩샤오핑은 결국 정치적 개혁에는 실패한 인물이다. 그의 성정(性情)을 표현하는 말, ‘공적과 실리에 지나치게 매달린다(急功近利)’는 말 그대로 덩샤오핑은 경제의 개혁개방에만 골몰하면서 중국사회를 한 단계 격상시킬 수 있었던 정치개혁에는 둔감했다.

 

마오와 덩이 구축한 정치적 틀에 민족주의적 취향을 내세운 시진핑이다. 이는 전임자가 남긴 ‘문제’에 둔감하며 글로벌화한 지구촌의 시류에도 맞지 않는 모양새다. 중국은 그에 따라 과도할 정도로 하드웨어적인 국력 쌓기에 골몰할 태세다. 가치(價値)적 인식보다는 실용적 선택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시진핑은 전임 지도자들의 충실한 계승자다. 그러나 마오가 사회주의 건국의 혁명가, 덩샤오핑이 중국의 일대 전환을 이끈 개혁가임에 비해 그는 그런 ‘가(家)’라는 타이틀을 달 수 없는 평범한 ‘정치인’이라는 한계를 벌써 드러냈다. 마오와 덩에 비해 분명히 작고, 장쩌민과 후진타오에 비해서도 특별히 나을 게 없어 보인다는 점, 무대 위에 올라 시진핑이 드러낸 뚜렷한 특징이다.

2013-03-28 14:2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