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범려와 저우언라이를 배출한 策士의 고향

   

“환경이 그곳의 사람을 기른다(一方土地, 養一方人)”는 중국말이 있다. 중국은 그만큼 다양한 지역에 독특한 문화가 자란다. 그 밑바닥을 살피는 일이 중국을 제대로 아는 길이다. 시사적 흐름에서 살펴볼 만한 인물, 또는 역사적 관점에서 관찰할 인물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 바탕에 대한 이해를 통해 궁극적으로 중국을 알기 위함이다. 지난해 중국 공산당 당 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 오른 위정성(兪政聲)의 고향인 동남부 저장의 사오싱을 먼저 찾았다. (월간중앙 연재 중)

   

   

범려와 저우언라이를 배출한 策士의 고향 
 

문인기질이 가장 왕성한 곳

   


- 서호(西湖)의 전경이다. 드넓은 서호는 저장성의 상징에 가깝다.

   

중국 동남부에 있는 저장(浙江)이라는 곳은 예로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곳이다. 과거(科擧)에 급제하는 비율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단순한 문인으로부터 높은 벼슬로 올라가는 신분의 상승 길목인 그런 과거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사람이 많았다는 얘기는 이 지역이 다른 지방에 비해 문기(文氣)가 흥성했다는 점을 말해준다.  
 

중국의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 ‘인구의 이동’이다. 중국 북부는 겨울이 빨리 찾아온다. 하늘이 높아지고, 말이 살찌는 그런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은 중국 서북부 지역에 살던 중국인들에게는 재앙의 큰 조짐이기도 했다.  
 

서부 칭하이(靑海)에서 발원해 동쪽으로 흐르는 황하(黃河)는 산시(陝西)와 산시(山西)의 접경에서 북으로 한껏 올라간다. 그 북단의 지점은 가장 빨리 물이 어는 곳이다. 두껍게 황하의 물이 얼어붙으면 북방의 유목민족은 남하를 시작한다. 한 여름 무성하게 자란 초원의 풀을 뜯어 먹고 살을 찌웠던 말에 올라타고서 말이다.  
 

유목의 중원 침략은 다반사(茶飯事)에 해당했다. 그들이 휩쓸고 간 지역은 초토화(焦土化)하기 일쑤였다. 남성은 어린애까지 포함해 모두 죽였고, 재물은 남는 것이 없었다. 여성은 물론 모두 데려가는 대상이었다. 그런 유목의 침략을 피해 인구는 남하를 시작했고, 단순한 침략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목이 중원을 아예 차지해 경영하는 경우에도 중원의 원주민들은 이어지는 전란과 재난을 피해 늘 남쪽으로 이동하기 마련이었다.  
 

장강(長江) 이남 지역은 중원으로부터 재난과 전란을 피해 이동하는 인구들이 가장 많이 몰린 지역이기도 했다. 특히 저장 지역은 산이 발달하고 무수한 강과 하천이 벌판을 가른다. 고립된 지형이 발달해 한 지역을 차지하고 숨어살기 안성맞춤에 해당했다. 아울러 도작(稻作)이 발달하고 기후가 좋아 전란과 재난을 피해 이동한 인구의 정착지로서는 매우 훌륭했다.  
 

중국이 위(魏)와 촉(蜀), 그리고 오(吳)나라의 이른바 ‘삼국시대’를 지나면서 극심한 분열기를 거칠 때 특히 인구는 대거 남쪽으로 이동했고, 그 즈음에 중원 지역의 사대부와 문벌 귀족들이 가장 많이 몰린 곳이 저장과 인근 지역이다. 그런 연유로 인해 저장은 일찍부터 중원지역에서 성장한 사대부와 문인 계층의 1차 집결지에 해당했다.  
 

그에 따라 중국에서 유명 문인이 가장 많이 나온 곳이 바로 이 저장이다. 각종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중국 유명 문인 중 저장 출신은 전체의 6분의 1에 해당한다. 30개가 넘는 중국 각 성과 자치구의 현황으로 볼 때 이 숫자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저장의 문인을 빼놓고는 중국의 문학사를 온전하게 기술하기 힘들다고 봐야 할 정도다. 따라서 저장은 문인과 고위 관료의 고향이라고 봐도 좋다. 그만큼 왕성한 인문의 기운이 지배하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지역 출신들의 성향을 논할 때 저장이 지닌 특유의 문인 기질이 반드시 나온다.  
 

지난해 11월 15일에 막을 내린 중국 공산당 18차 당 대회에서 중국 최고 권력인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7인 멤버에 오른 사람 가운데 위정성(兪政聲)이 바로 이 곳 저장의 사오싱(紹興) 출신이다. 그는 우선 다른 상무위원 6인을 압도하는 측면 하나를 지니고 있다. 바로 가문(家門)이다.  
 

그의 증조부는 위밍전(兪明震 1860~1918)이다. 청나라 말의 개혁군주 광서제(光緖帝) 때 진사에 급제한 인물로 장강 이남의 이른바 ‘강남’ 일대에서 가장 유명했던 문인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우선 그는 중국 최고의 문인으로 꼽히는 루쉰(魯迅)이 매우 존경하는 스승이기도 했다.  
 

그 명망가 집안답게 위정성의 가문은 수재(秀才)가 즐비하다. 그 수재라고 함은 머리가 뛰어나다는 의미의 수재이자, 아울러 진사에 오르기 전 등급의 과거에 합격한 사람을 일컫는다. 그 수재와 관련해 중국에서 전해오는 말이 하나 있다.  
 

“수재는 문밖으로 나서지 않아도 천하의 일을 죄다 안다(秀才不出門, 知天下事)”는 말이다.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 바로 저장 사람일지 모른다. 머리가 뛰어난 수재는 외출을 해서 남에게 무엇인가를 듣지 않아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정보 등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다는 말이다.  
 

빠른 두뇌 회전이 반드시 그 뒤를 따라야 함은 물론이겠고, 게다가 명석한 머리로 깔아놓은 여러 정보망을 통해 올라오는 소식 등을 놓치지 않아 세상의 모든 일에 대응할 수 있다는 말이다. 지적인 판단은 물론이고 사람 사이에 만들어지는 관계망을 통해 웬만한 일을 옳게 처리하는 능력을 쌓는다는 말이다.  
 

그런 저장성의 전통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위정성 가문의 텃밭인 사오싱이다. 이 사오싱이라는 곳은 어떤 면에서 보면 저장을 대표하는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문인의 기질이 가장 왕성해 ‘문밖을 나서지 않고서도 세상의 이치를 두루 꿰는’ 수재 스타일의 인물이 가장 많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오싱은 책사의 고향

   

사오싱은 ‘사야(師爺)’라고 적는 일군의 재주꾼들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다.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에 들어서면서 저장의 사오싱은 곧 ‘사야’들의 고향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이 ‘사야’라고 적는 인재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중국의 가장 오래 된 관제(官制)는 주(周)나라 때 등장했다. 춘추시대 이전에 해당하니 지금으로부터 2500년이 더 흘렀다. 주례(周禮)와 예기(禮記), 의례(儀禮) 등의 주나라 예법에 등장하는 관제 중의 하나에 막인(幕人)이라는 존재가 있다. 이들은 대개 장막과 책상을 담당하는 직무의 관리들이었다.  
 

특히 임금으로부터 군권(軍權)을 부여받아 전쟁 관련 사무를 위해 지방으로 또는 전쟁터로 나가는 무장(武將)들에게는 늘 출장이 큰일에 해당했다. 병력을 움직이는 일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들을 지휘하기 위해 사령부를 설치하고 지휘소를 옮기는 일이 번거로울 수밖에 없었다.

   

- 저장이 낳은 현대 중국의 대문호 루쉰의 생가 기념관 입구다.

   

전쟁을 지휘하는 무장이 지휘소를 옮길 때 그 장막을 관장하며, 장수가 사용하는 책상을 관리하는 사람이 바로 막인이었다. 원래의 의미는 그에서 비롯했지만 결국 그 막인은 전쟁을 지휘하는 지역 사령관의 핵심 참모라는 뜻을 얻는다.  
 

이 막인으로부터 나온 단어가 막료(幕僚), 그리고 막부(幕府)다. 막료라는 존재는 행정 관료나 지역 수장, 또는 전쟁 관련 사무를 모두 관할하는 지역 사령관의 핵심 참모라는 뜻이고, 막부는 그들이 거처하는 곳의 의미다. 모두 나중에는 권력을 지닌 사람의 참모와 그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라는 뜻을 얻는다.
 

관제의 명칭에 등장하는 막인이라는 직급은 그 업무가 단순했다. 지방 행정관료 또는 지역 사령관을 수행하면서 그들이 거주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장막을 옮기고 책상을 나르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이 말이 어떤 관료나 지역 수장, 나아가 병권을 쥔 장수의 핵심 참모라는 뜻으로 자리매김하는 계기는 그 뒤다.  
 

동진(東晋 316~420년) 때에 생긴 일화다. 동진은 삼국시대에 이어 중원의 권력을 차지한 서진(西晋)이 북방의 유목 민족 정권에 밀려 장강 이남으로 밀려 내려온 뒤 세워진 왕조였다. 그 동진에 환온(桓溫)이라는 권력가가 있었다. 그 역시 동진의 왕조 세력과 함께 중원지역에서 장강 이남으로 밀려 내려온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에 견줄 수 있는 인물이 사안(謝安)이었다. 역시 동진의 관가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인물로, 환온이 라이벌로 생각하는 중량급의 관료였다. 하루는 사안이 환온의 집을 예고 없이 방문했다. 환온은 정치적 라이벌에 해당하는 사안에게 감출 일이 적지 않았다. 특히 그가 곁에 두고 있는 인물을 함부로 노출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일설에는 환온이 당시 동진의 정권을 노리는 정략에 몰두하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극비리에 일을 진행하다 보니 사안 등에 그런 조짐을 보일 수 없는 노릇이었다는 것이다. 환온은 어쨌거나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들을 모아 궁정 쿠데타를 논의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연유로 극초라는 이름의 사람이 마침 환온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둘은 무엇인가를 열심히 모의하고 있었던 듯하다. 사안이 온다는 말을 듣고 극초는 환온의 지시에 따라 얼른 몸을 감췄다. 내실(內室)의 장막 뒤편이었다. 환온의 집을 찾은 사안은 그 장막 밖의 거실에서 환온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때 마침 바람이 불었다. 장막이 걷히면서 극초의 모습이 드러났다. 사안은 그가 장막 뒤에 숨어 있던 이유를 얼른 짐작했다. 마음속으로는 ‘결국 너희들이 함께 노는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사안은 그저 웃으면서 “극초 선생이 어느덧 장막 안의 손님(入幕之賓)이 되셨구랴” 고만 말했다.  
 

중국 역사에서 누군가의 핵심 참모라는 의미의 ‘막료’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계기였다. 사안과 환온, 극초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이 일화에서 결국 오늘까지 무엇인가 같은 뜻을 세우고 행동과 사고를 함께 하는 참모라는 의미의 ‘막료’와 ‘막부’라는 단어가 생겨났던 것이다.  
 

동진의 수도는 지금으로 따지면 난징(南京)이다. 그러나 사안의 고향이 바로 저장의 사오싱이다. 지금의 난징에 수도를 둔 동진 왕조의 상층은 대개가 중원에서 이미 몰락한 서진 왕실을 따라 함께 남하한 문벌 귀족 가문의 구성원들이었다. 전란이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권력자를 중심으로 뭉쳤고, 어느 정도의 기반을 다진 권력자들은 그런 문벌 귀족 가문 중에서 뛰어난 사람들을 ‘스카우트’해서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풍조가 있었다.  
 

사안과 환온의 일화는 그런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내용이다. 아울러 그런 분위기 속에서 중국은 우선 힘을 모은 권력자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이합집산(離合集散)하는 풍경을 그려내고 있는 중이었다. 막료와 막부는 그렇게 모습을 드러냈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중요성은 점점 더해진다.  
 

대개 동진 시기를 중심으로 이런 막료와 막부가 초기의 모습을 드러낸 뒤 중국 역사의 흐름 속에서 참모를 지향하는 그룹의 인재들은 늘 생겨났고, 뚜렷한 기능을 수행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당(唐) 나라 이후 지방 행정관의 권력이 더욱 강해지면서 중앙의 관료임용 제도를 거치지 않은 참모들의 발탁과 등용은 더욱 성행했다. 당 나라 이후의 어지러웠던 시절인 오대(五代) 시기에는 그 도가 훨씬 더 했다고 한다. 북송(北宋)에 들어서면서 지방 막료에 관한 임용을 중앙이 통제하면서 이런 풍조는 잠시 멈칫한다.  
 

그러나 명대에 들어서면서 이는 훨씬 더 정형화한다. 특히 저장성, 그 중에서도 사오싱의 인물들은 각 지방 관리, 병권까지 지니고서 큰 힘을 행세하는 지역의 수장 밑에서 돈을 주무르고, 장부를 관리하며, 출세를 위해 다른 사람과 교신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문장 써주기’ 대리인 등으로 맹활약을 한다. 아울러 좀 더 높은 권력을 차지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따라야 하는 책략과 모략의 제공자 역할도 한다.  

 

그래서 그 즈음에 뜨는 게 저장의 서리방(胥吏幇)이다. 서리는 행정의 주요 계통에 서있지는 않으나 실무 행정에 있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인재 그룹이다. 특히 중앙행정과는 아주 다른 차원에서 펼쳐지는 지방행정에 있어서는 이들 ‘서리’, 또는 우리 식 표현인 ‘아전(衙前)’들은 필수적이었다. 그 서리 그룹 중에서도 저장 출신의 서리들이 이름이 높았고,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했던 그룹이 사오싱의 서리 그룹이었다.

 

‘사야’라는 단어는 명나라 때, 혹은 그 이후인 청나라 때 본격적으로 유행하는 말이다. 강력한 권력을 쥔 지방 행정관의 밑에서 일을 도모하고, 일을 진행하는 사람이다. 특히 자금 관리와 세수(稅收) 행정, 책략의 구성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울러 문장 솜씨가 뛰어나 지방 행정 수장을 대신해 대외 교섭에 필요한 서신 등 글을 작성하는 사람은 도필리(刀筆吏)라고 불리기도 했다.

 

- 베이징~항저우를 잇는 고대 경항 대운하의 출발점이 바로 저장의 항저우다. 저녁 어스름에 떠나는 화물선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나그네의 여행길 우수가 느껴지는 장면이다.  

   

막후의 책략가 저우언라이

   

이 서리는 고위급 관료에게 붙일 수 있는 단어는 아니다. 우리식의 ‘아전’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직급을 고위 관료에 병렬로 붙일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직능을 이야기하자면 상황은 달라진다. 자신이 모시는 상관을 위해 책략을 꾸미고, 자금줄을 관리하며, 대외 교섭을 주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중국식 아전, 즉 ‘사야’의 기능을 두고 볼 때 그 이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사오싱 출신으로 사회주의 중국의 초대 총리를 맡았던 저우언라이(周恩來)다. 저우언라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었던 중국 건국의 영웅 마오쩌둥(毛澤東)을 옆에서 보필하며 그 장대한 꿈을 이룬 인물이다.  
 

그는 대신 ‘만년 2인자’였다. ‘주군(主君)’에 해당하는 마오쩌둥의 권좌에는 한 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건국과 그 뒤에 벌어진 혹심한 정치적 풍파를 모두 겪은 인물이다. 마오쩌둥과 함께 걸어온 건국 전의 혁명 과정은 한국의 일반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건국 뒤 그는 마오쩌둥이 과격한 사회주의 실험을 실행할 때에도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아울러 늘 총리 자리를 유지하면서 문화대혁명의 시련기를 거친 뒤 중국의 대미 수교와 그에 필요한 각종 교섭, 문혁 뒤의 혼란 상황 등을 모두 관리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에게 늘 따르는 이미지는 치밀한 전략, 피바람 부는 권력 투쟁에서도 허점을 드러내지 않은 용의주도함, 마오쩌둥의 초법적인 권력에 자칫 생명을 꺾을 수도 있었던 요인들에 대한 세밀한 배려 등으로 유명하다.  
 

그는 특히 미국과의 교섭에서 큰 능력을 발휘했다. 소련이 버티고 있던 냉전 시절의 국면을 관리하면서 헨리 키신저 당시 미 국무장관과 막후에서 숨 막히는 교섭을 벌여 결국 냉전시대의 틀을 벗어 버리고 미국과의 수교를 성사시킨 공로자다. 아울러 제3세계 비(非)동맹 외교의 축을 형성해 건국 뒤의 중국을 국제무대의 중요한 변수로 올려놓은 과정에서도 그의 수완은 빛을 발했다.  
 

마오쩌둥의 거칠고 강한 전략의 토대가 저우언라이의 노련하면서도 세련된 추진능력과 결합해 중국 공산당으로 하여금 힘의 절대적 우위에 있던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권과 10년에 걸친 내전 끝에 막판 뒤집기에 성공토록 했다는 점도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 저우언라이에게는 늘 막후의 교섭자, 막후의 전략가라는 별칭이 붙어 다녔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저우언라이는 자신이 태어난 사오싱의 가장 뚜렷한 전통인 ‘사야’의 맥을 제대로 이었던 사람이다. 전통적으로 세밀한 관리가 가능하며, 어려운 행정의 계통을 잡는 데 특출하며, 아울러 책략의 깊은 전통을 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중국의 초기 경제학자이자 중국에 인구학의 개념을 정책 분야에 본격적으로 도입한 마인추(馬寅初 1882~1982)도 이 사오싱 출신이다. 그는 탁월한 인구학 분야의 안목으로 중국의 건국 뒤 경제발전과 인구수에 관한 이론을 제시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1992년 이후 중국의 금융을 이끌어 온 쩡페이옌(曾培炎) 부총리도 이곳 사오싱 출신이다.  
 

그는 무려 15년 넘게 중국의 재정과 금융을 이끌었던 사람이다. 장쩌민(江澤民)의 이른바 ‘상하이방’ 일원으로 그의 집권 기간 내내 재정과 금융 업무를 이끌었고, 아울러 중국의 장기적인 발전계획 수립과 집행을 맡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저우언라이에 비해 훨씬 전에 태어나 활동했던 사오싱 출신의 인물 중에도 우리가 꼽을 만한 사람이 아주 많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아무래도 중국 최고의 명필인 왕희지를 내세우지 않을 수 없다. 중원지역에서 서진의 왕실을 따라 남으로 내려온 가문의 일원인 왕희지는 사오싱에 살면서 유명한 ‘난정집서(蘭亭集序)’를 남긴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그 명필의 글씨를 너무 흠모한 나머지 자신의 무덤에 부장(副葬)토록 했다는 그 작품 말이다. 요즘도 사오싱을 방문한 사람들은 왕희지가 친구들과 함께 시를 읊고 글을 남겼다는 난정의 유적지를 구경할 수 있다.  
 

그에 못지않게 유명한 인물이 서시(西施)다. 중국의 4대 미녀, 혹은 중국 최고의 미녀로 꼽히는 사람이다. 사오싱에서 조금 떨어진 주지(諸曁)에서 태어난 뒤 오(吳)나라에 끌려가 그 유명한 범려(范蠡)와 함께 조국인 월(越)나라를 위해 고도의 모략을 펼친 인물이다.  
 

그 월나라의 본거지 또한 사오싱이다. 따라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노력으로 오나라의 부차(夫差)에게 끝까지 저항해 마침내 나라 빼앗긴 설움을 설욕했다는 월나라 임금 구천(句踐)의 고향이 사오싱이다. 토사구팽(兎死狗烹), 조진궁장(鳥盡弓藏)의 성어를 남긴 주인공이다.  
 

특기할 사람이 또 있다. 앞에서 잠시 소개한 사안(謝安)이다. 그는 8만의 군사로 100만에 달한다는 전진(前秦) 부견(苻堅)의 군대를 물리친 전략가로 유명하다. 원래는 서진 명망가의 자제로 문학 등에서 재주가 뛰어났으며, 명필 왕희지와의 교분으로도 이름이 나 있다. 정치적으로 어려웠다가 결국 그를 딛고 재기에 성공했다는 의미의 ‘동산재기(東山再起)’라는 성어로도 유명하다.  



- 저장 사오싱 인근 주지라는 곳에 있는 중국 최고 미녀 서시의 사당. 후대 중국인들이 상상한 서시의 상이지만, 그녀는 어쨌든 ‘절세의 미녀’라고 알려져 있다.  
 

전진과의 전쟁에 앞서 동진 왕실을 전복하려는 환온이라는 권세가의 쿠데타 음모를 제압하고, 이어서 북쪽으로부터 내려온 막강한 병력의 전진 왕실 부견의 침략 야욕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그는 매우 출중한 정치가, 나아가 천재적인 군사 전략가로서 이름이 높다.  
 

위에서 소개한 인물 중 명필 왕희지를 제외한다면 대개가 다 전략과 정략, 수리(數理)적 능력에 매우 뛰어난 면모를 보인 사람들이다. 저우언라이의 전략적 안목은 중국에서 지금까지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다. 뛰어난 교섭 능력 또한 마찬가지다. 일의 전체적인 맥락을 잘 잡아 쓸 데 없이 힘을 분산시키지 않으면서 제 목표를 이뤄가는 스타일의 사람이다.  
 

그런 저우언라이의 스타일은 사오싱이 전통적으로 많이 배출한 책략가 그룹 ‘사야’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치밀한 계산과 신중한 행동, 유연한 사고력과 착실한 집행력 등을 두루 갖춘 그런 책략가와 실무 행정가의 면모 말이다.  
 

범려의 책략을 충분히 인지한 뒤 그를 따라 오나라에 침입해 미인계로써 오나라 임금 부차를 패망으로 이끌어간 서시, 8만의 병사로 100만의 전진 부견의 군대를 꺾은 탁월한 군사 전략가 사안, 장쩌민의 경제 좌장으로서 중국의 금융과 재정을 오래 이끌었던 쩡페이옌 등의 면면이 다 그렇다.

   

     

심모원려의 문화적 기질

   

그러나 이곳 출신 유명인사 모두가 다 그렇지만은 않다.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강력한 애국적 정서를 선보였던 루쉰이나, 그에 800년 앞서 태어난 남송의 애국 시인 육유(陸游) 등은 모략과 정략에 뛰어나다고 하기보다는 우직한 정신력의 소유자에 가깝다.  
 

루쉰은 『아Q정전』 『광인일기(狂人日記)』 등의 작품을 통해 제국 열강에 시름시름 앓고 있는 중국의 재기(再起)를 촉구한 애국 문인이며, 육유는 강렬한 민족주의적 정서로 몽골의 원(元)에 쫓기고 있는 송(宋)나라의 부흥을 외쳤던 시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이들이 모두 문인의 기질을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우언라이나 루쉰, 사안이나 육유 등은 얼핏 보면 기질이 달리 보이지만 사람의 행동과 사고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깔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 남송의 애국 시인 육유와 그의 애인이 함께 거닐던 정원 앞의 두 사람 소상(塑像)이 당시의 낭만적 분위기를 전해준다.

   

저장성이라는 곳에는 사오싱만 있지 않다. 그 옆에 자싱(嘉興)이라는 곳도 있고, 해안가로는 닝보(寧波)라는 곳도 있다. 인구 7000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저장은 드넓고 또 다양하기도 하다. 그러나 모두에서 설명한대로 이곳은 전통적으로 문인 기질이 매우 강하다.  
 

그 문인 기질은 때로는 우직한 정서를 표출키도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을 바탕으로 아주 유연한 책략을 뿜어내는 뿌리로도 작용한다. 사오싱은 그런 점에서 저장의 대표적인 도시에 해당한다. 그에 가까이 있는 항저우(杭州)가 저장을 대표하는 간판 성도(省都)이기는 하지만 한 때 남송(南宋)이라는 왕조의 수도가 있었던 데다가 여러 곳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모여든 대처(大處)라서 저장의 정서를 제대로 반영하기 힘들다는 약점이 있다.  
 

그보다는 전통적인 문인의 기질이 그대로 살아 있고, 아울러 청나라 때까지 줄곧 ‘사야’의 전통을 강력하게 유지했던 사오싱이 저장의 정서와 역사적 맥락을 더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볼 수 있다. 지난해 11월 중국 공산당 18차 당 대회를 통해 권력 정점에 올라선 위정성은 그런 저장의 정서, 나아가 ‘사야’의 전통을 짙게 간직한 인물이다.  
 

그에게는 심모원려(深謀遠慮)의 책사 기질이 돋보인다는 게 중국 국내외 언론들의 중평이다. 깊은 생각 끝에 움직이면서 결국은 자신이 품은 뜻을 펼치는 데 능하다는 평이다. 그에게서는 우선 저우언라이의 지혜가 언뜻 비쳐지고, 군사전략가 사안의 면모도 보인다. 흉중의 깊은 뜻을 펼치려는 날카로운 책략가의 분위기도 풍긴다.

2013-04-19 17:2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