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덩샤오핑을 시진핑이 제대로 따라할까 -개혁개방 총설계사의 고향 쓰촨-

 

- 선전에 있는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의 동상이다. 현대 중국에서 그의 자취는 매우 강력하다. 그는 쓰촨이 낳은 현대 중국 인물의 으뜸이다. (중앙일보 조용철 기자 제공)

   

“쓰촨(四川) 땅의 개는 해를 보면 짖는다”는 중국 성어(成語)가 있다. 한자로 적으면 ‘촉견폐일(촉견폐일(蜀犬吠日)’이다. 이 성어는 뚜렷한 의미에서 쓰촨의 사람들을 깔보는 말이다. 그 내용인즉 이렇다.  
 

중국 서남부의 거대한 분지(盆地)인 쓰촨에는 아주 큰 평야가 발달해 있다. 서북쪽으로는 해발 4000m를 넘는 티베트 고원이 막아섰고, 북쪽으로도 중국 전통 중원(中原) 지역과 경계를 형성하는 큰 산들이 지나간다. 동쪽으로는 험준한 싼샤(三峽), 남쪽으로는 윈난(雲南)의 고지대에 둘러싸여 있다.  
 

이 쓰촨의 평원은 면적이 대략 30만㎢다. 한반도 면적 22만㎢에 비해 훨씬 크다. 거대한 분지이니만큼 이곳의 일기는 청명(淸明)하기보다는 짙은 운무(雲霧)에 가리는 적이 훨씬 더 많다. 그래서 맑은 하늘에 쨍쨍한 해를 볼 수 있는 날이 적다.  
 

그런 자연적 환경에서 자란 강아지들에게는 해가 낯설 수밖에 없다. 가끔 해가 하늘 가운데 떠오르면 그 모습이 오히려 이상해 그 해를 보고 짖는다는 말이다. 그곳의 개만 보고 이 말을 했으면 그저 그렇거니 하고 넘어갈 수 있다. 이 말이 지니는 함의(含意)의 직접적인 대상은 쓰촨 사람들이다. ‘해를 보고 짖는 개’라는 성어가 쓰촨의 사람들을 직접 겨냥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얘기다.  
 

바깥 세계에 흥미를 두지 않고, 새로운 사물에 신경을 ‘끄고’ 사는 사람들이라 외부의 환경에 둔감하며, 아울러 외부의 세계가 일으키는 새로운 변화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얘기다. 마치 쓰촨 땅의 개가 해를 보면 짖는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쓰촨 사람들의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비판할 때 이 말은 곧잘 등장한다.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라고 일컬어지는 덩샤오핑(鄧小平)의 고향이 바로 쓰촨이다. ‘해를 보면 짖는 개’와 죽의 장막에 철저히 가려 은둔과 자폐(自閉)의 깊은 이념적 늪에 빠져 있던 중국을 일거에 개혁과 개방으로 전환시킨 덩샤오핑의 사고는 아무래도 닮지 않았다. 그저 닮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하늘과 땅의 천양지차(天壤之差)다.  
 

그렇다면 우리는 ‘해를 보면 짖는 개’의 이야기가 다른 지역 사람들이 쓰촨의 사람들을 두고 비아냥거리거나, 괜히 모욕을 주고 싶어 만들어낸 정도의 성어(成語)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쓰촨 사람들에게는 현실적인 가치관에 골몰하면서 남의 시선 등에는 전혀 눈길을 두지 않는 폐쇄성이 분명히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는 아주 작은 단면에 불과하다. 그런 토양에서 중국 개혁개방을 이끈 ‘대 전환’의 개혁가가 나왔다는 점을 상기하면 더 그렇다.

   

쥐와 고양이에 관한 냉정한 관찰자들   
 

- 쓰촨 광안에 있는 덩샤오핑의 생가. 어린이들의 해맑은 표정이 인상적이다. (중앙일보 조용철 기자 제공)

   
사실 해를 보고 짖는 개에 앞서 우리가 쓰촨하면 먼저 떠올려야 하는 말이 있다. 바로 ‘천부지국(天府之國)’이다. 이 천부지국이라는 말이 다른 게 아니다. 바로 ‘하늘나라’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늘나라 천국의 개념과는 다소 다를 뿐, 사람이 살아가기에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환경을 갖춘 곳이라는 뜻이다. 가장 이상적인 지역, 그래서 영역하면 바로 파라다이스(Paradise)다.
 

앞에서도 소개했듯이 이 지역은 크고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30만㎢ 넓이의 대평원을 끼고 있다. 거기에 중국 남부의 일반 지역이 그렇듯이 강수량이 풍부하다. 아울러 장강(長江)의 큰 물줄기를 비롯해 다양한 갈래의 하천이 지나간다. 따라서 비옥한 땅, 풍부한 수원(水源), 온화한 날씨 등 천혜의 농업자원을 모두 지닌 곳이다.  
 

그런 환경에 거대한 면적의 농토가 발달했으니 쌀을 비롯한 곡량(穀糧)과 채소(菜蔬)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편안한 생존 환경을 갖췄으니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말건 신경 쓸 일 없다. 그런 쓰촨 사람들의 한 성격적인 단면을 꼬집어 비튼 게 ‘해를 보면 짖는 개’임에 틀림없다.  
 

거대한 곡창(穀倉)에 진배가 없으니 그곳에 들끓는 동물이 있을 법하다. 바로 사람의 곁에 바짝 붙어살면서 역시 사람들이 거두는 곡식 등을 곁눈질하며 훔쳐 먹는 쥐다. 쥐 하면 역시 부정적인 이미지가 우선이다. 사람들이 힘들여 생산하는 곡식을 도둑질하는 그런 생존 습성 때문이다.  

   

- 비가 오는 쓰촨 청두 거리 모습이다. 해가 쨍쨍하게 떠오른 날이 드물다. 안개와 높은 습도, 그리고 무언가에 늘 가려진 분위기가 이곳에서는 강하게 느껴진다. (중앙일보 조용철 기자 제공)

   
그 쥐의 천적은 다름 아닌 고양이다. 쥐는 한자로 ‘서(鼠)’다. 우리에게도 이 쥐에 관한 한자 성어(成語)는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태산명동에 서일필(泰山鳴動 鼠一匹)’하면 온갖 호들갑을 떨어 난리가 난 듯 법석을 떨었으나 겨우 쥐 한 마리가 사태의 주범이었다는 말이다.
 

중국인에게 이 쥐는 좀 더 노골적인 불만과 노여움의 대상이다. ‘쥐 한 마리 지나가니, 사람들이 때려죽일 듯 덤빈다(老鼠過街, 人人喊打)’는 말이 있고,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불온한 존재로 쥐를 등장시켜 ‘사서(社鼠)’라는 표현을 쓴다. 예전에는 봉건 왕조에서 세금을 거둘 때 쥐가 갉아 먹고 훔쳐 먹는 곡식을 농민에게 부담을 시킨 사례가 있다.  
 

세금을 내는 농민들로서는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쥐가 훔쳐 먹는 곡식의 양을 미리 산정해 그 금액만큼을 세금에 보태 더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쥐라는 놈은 무엇인가 손해를 끼친다는 의미에서 ‘소모(消耗)’의 ‘모(耗)’라는 글자를 붙여 ‘하오쯔(耗子)’라고 부르는데, 이 단어가 가장 유행했던 곳이 바로 쓰촨이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한 유명한 발언이 있다. “노란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그저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는 내용이다. 우리에게는 검은 고양이와 하얀 고양이의 ‘흑묘백묘(黑猫白猫)’로 알려져 있으나, 그 원전(原典)은 노란고양이와 검은 고양이의 황묘흑묘(黃猫黑猫)다. 같은 쓰촨 출신이자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늘 함께 싸웠던 동지 류보청(劉伯承)이 평소에 즐겨 쓰던 고향 속담을 덩샤오핑이 다시 인용하면서 유명해진 말이다.  
 

쥐가 등장하는 쓰촨 속담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풍부한 식량 생산지인 까닭에 그 땀으로 거둔 식량을 몰래 훔쳐 먹는 쥐가 특별한 미움의 대상이었으리라는 점은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문화적 풍토에서 쥐를 늘 관찰하던 쓰촨 사람에게 노란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아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움텄던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덩샤오핑의 ‘황묘흑묘’에 관한 명언은 매우 상징적인 발언이었다. 그는 중국이 이념적 틀을 벗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개혁개방을 추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 표명에 해당했다. 그 이후로 벌어진 중국 개혁개방의 눈부신 성과는 지금의 전 세계 사람들이 모두 목격하고 있는 장면 그대로다. 중국은 줄곧 강력한 개혁개방의 노선을 걸어 이제 미국과 맞먹는 G2의 시대를 열어젖히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고양이의 털 색깔은 ‘명분과 외형’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은 고양이에게 주어진 사명, 즉 쥐를 잡는 일이다. 겉을 두르는 모든 형식과 명분을 물리치고 본질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이 말 안에는 담겨 있는 셈이다. 실제 중국은 1949년 건국 뒤 걸어왔던 폭풍과 같았던 이념적 쏠림을 모두 거둬 치운 뒤 실용주의에 매달렸다.  
 

자신의 얼굴을 형성했던 공산주의와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절묘하게 결합했다. 이른바 ‘사회주의 시장경제’였다. 그 지향점은 국가경제의 발전이자, 강성한 국가를 만들어 세우는 작업이었다. 그 지향점에 닿기 위한 방법은 ‘노란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다 좋았다. 쓰촨의 풍토에서 자라나 덩샤오핑의 입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황묘흑묘’의 격언은 결국 세계를 놀라게 한 중국 개혁개방의 힘찬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식량을 훔쳐 먹는 쥐, 그리고 그 쥐를 좇는 고양이. 이 둘을 바라보는 쓰촨 사람들의 시선은 매우 실용적이다. 간단한 상징에 불과하지만 그런 고도의 실용적 사고는 우리가 매우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목표를 상정했으면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도에 관해서는 솔직하고 대담해져야 한다. 이리저리 볼 것 다 보고, 따질 것 다 따져 본 다음에 움직일 일이 아니다.  
 

상정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형식과 겉치레의 모든 군더더기를 버리고 목표점에 가장 빨리 도달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내 그를 활용해야 한다는 얘기다.  
 

덩샤오핑은 그런 실용적 사고를 중국 현대 정치경제 사상의 흐름에 가장 거창하게 드러내 보인 구현자에 해당한다. 그 덩샤오핑의 사고는 ‘황묘흑묘’ 이론에 잘 나타나 있고, 그런 속담이 충분히 발달해 문화적 전통으로 영글었던 지역이 쓰촨이라는 점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쓰촨이란 말인가.  
 

‘황제’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의 자유로움

   

중국말에 “산은 높고 황제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말이 있다. 한자로는 ‘산고황제원(山高皇帝遠)’이라고 적는다. 황제는 늘 중국인이 삶을 이어가는 공간 속의 중심이었다. 그러면서도 황제와의 거리는 늘 관심의 대상이었다.  
 

‘황제’는 제국의 상징이다. 중국이라는 땅 위의 모든 질서를 이끄는 체계이자 제도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간섭과 견제는 훨씬 줄었다. 산이 높고 강이 깊어 황제 권력의 장력(張力)이 상대적으로 덜 미치면 그런 간섭과 견제는 더 줄었다.
 

쓰촨은 그런 곳이다. 중원이라고 일컬어지는 황제의 거소(居所)로부터 많이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높은 산지와 거대한 하천에 둘러싸여 황제로부터 뻗치는 권력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곳이다.
 

중국의 전통적인 판도를 보면 중원(中原)이라고 불리는 곳은 늘 권력의 중심이 머물렀던 지역이다.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의 통일왕조를 세운 뒤 그를 이어 받았던 왕조의 권력자들은 대개 중원 지역에 수도를 세웠다. 초기의 장안(長安)과 낙양(洛陽), 후대의 베이징(北京) 등이 대표적 수도였다.
 

황제의 힘은 중원의 수도를 중심으로 중국 전역에 펼쳐진다. 그러나 중심에서 방사(放射)하는 힘의 크기가 중국 전역에 고루 퍼질 수는 없다. 힘이 뻗쳐나가는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그 지역이 받는 힘의 크기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거꾸로 말하면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황제의 모든 간섭과 견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는 얘기다. 따라서 부채(負債)의식도 훨씬 적으며, 수도에서 정한 규범이 주는 속박감 또한 훨씬 덜하다.  
 

명대와 청대를 예로 들자면, 수도인 베이징으로부터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 있는 장쑤(江蘇)와 저장(浙江)에 비해 그로부터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광둥(廣東)과 쓰촨은 황제의 권력에 관한 체감의 정도가 훨씬 덜하다는 얘기다. 그래서 수도로부터 가까이 있는 지역의 문화가 황제가 이끄는 체제에 비교적 순종적이며 순응(順應)적인 데 비해, 그로부터 더 외곽에 있는 지역의 문화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 북쪽에서 쓰촨으로 내려오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험준한 지형에 세워져 있는 견고한 관문이다. 이름은 검문관. 제갈량이 이끄는 군대는 이곳을 넘어 북쪽인 장안으로 진격했다.

   

‘산 높고 황제는 멀리 있다’라는 중국 식 속언은 이런 사정을 나타내는 표현의 하나다. 황제의 체제가 지니는 엄격한 형식, 까다로운 절차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자면 체제가 지니는 여러 정규(正規)적인 요소보다는 비(非) 정규적인 요소에 주목하면서 나름대로 자유로운 사고와 관점을 발달시킨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탈(逸脫)이 자주 벌어지기도 한다. 1990년대 중국 공산당 중앙이 주도하는 개혁개방의 여러 시책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거센 개방성을 구가했던 중국 최남단 광둥 사람들이 “위에서 정책을 내놓으면 아래에서는 대책을 내놓는다(上有政策, 下有對策)”는 말을 만들어냈던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2012년 중국 정치계의 가장 큰 스캔들은 ‘보시라이(薄熙來) 사건’이었다. 공산당 중앙이 추구하는 개혁개방의 노선을 정면으로 거스르며 1960년대 벌어진 문화대혁명의 급진 좌파적 기운을 끌어 들여 경제 성장 위주의 정책 대신 분배와 평등을 모토로 내걸었던 충칭(重慶)의 공산당 서기 보시라이가 끝내 중앙의 견제에 걸려 낙마한 사건이다.  
 

보시라이 자체는 쓰촨 출신이 아니지만, 그가 서남부의 쓰촨 바로 옆의 충칭 당서기로 부임해 중앙이 내거는 정책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보를 보였다는 점은 자못 의미가 큰 대목이다. 황제의 권력이 머무르는 수도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서남부의 충칭에서 일을 벌인 이 사건은 ‘산 높고 황제는 멀다’라는 중국 식 격언의 현대판 전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쓰촨 사람 덩샤오핑의 개방 및 혼융(混融)의 사고

   

중국 서남부의 거대 분지 쓰촨은 원래 순수한 의미의 ‘중국’이 아니다. 중원에 사는 중국인들이 오랑캐가 사는 곳이라고 경멸했던 지역이다. 그 원래의 주인을 따지자면 내용은 좀 더 복잡해진다.  
 

- 청두에서 1시간을 자동차로 달려 광한에 도착하면 이상하게 생긴 이같은 청동 마스크가 손님을 반긴다. 약 5000년 전에 이곳에 존재했던 삼성퇴 문명의 흔적이다. 중국의 다원적 문명 갈래를 설명하는 유물들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진달래, 두견새 전설과 관련이 있다.  
 

1940년대에 한국의 시인 미당 서정주가 발표한 『귀촉도(歸蜀途)』라는 시집이 있다. 1970년대 한국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던 전설 한 토막이 그 모티브다. 옛 쓰촨 땅에 있었던 촉(蜀)나라의 망제(望帝) 두우(杜宇)라는 인물이 신임하던 부하에게 왕위를 물려줬는데, 나중에는 아내를 비롯해 모든 것을 빼앗긴 뒤 숲에 들어가 피를 토하며 울다 죽었다는 전설이다.  
 

두우가 울다 죽은 뒤 그 혼령은 두견새로 태어났고, 토했던 피는 되살아나 진달래로 피었다는 내용이다. 새 두견은 소쩍새, 접동새, 또는 귀촉도로 불린다. 두우의 피를 머금고 피어난 진달래는 두견화로 불린다. 그 두우가 살았던 곳이 지금의 쓰촨이다.  
 

그렇다고 같은 쓰촨 출신인 덩샤오핑을 두우의 후손이라고 할 수 없다. 이미 주인이 바뀌고 또 바뀌고, 거듭 바뀌는 역사가 쓰촨의 땅에서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지금 두우의 후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단지 현재 쓰촨 도회지인 청두(成都)로부터 차로 1시간 정도 달려 도착할 수 있는 광한(廣漢)이라는 곳에 있는 삼성퇴(三星堆)라는 박물관에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커다랗게 툭 튀어나와 있는 눈, 비정상적인 코, 그리고 턱없이 큰 귀를 지닌 기이한 모습의 청동 마스크 수 백여 개가 있는 이 박물관에서 우리는 두우의 전설을 희미하게나마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두우는 어림잡아 중국 춘추시대, 혹은 그 이전에 존재했던 인물로 보인다. 그 이후 지금의 쓰촨은 파촉(巴蜀)으로 불렸다. 현재의 충칭을 중심으로 하는 동부지역이 파(巴), 서부 광활한 평원지역이 촉(蜀)이다. 그 파촉의 지역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로 유명한 유비(劉備)와 제갈량(諸葛亮) 등이 들어와 촉한(蜀漢)을 세우면서 ‘해를 보면 짖는 개’가 있던 쓰촨은 본격적으로 북방 중국인들의 차지로 변한다.
 


- 청두 무후사에 있는 제갈량의 상이다. 이들이 쓰촨에 진입하면서 이곳은 본격적으로 중원 문명의 차지로 변한다.

   
쓰촨에는 그 이후로도 인구의 끊임없는 유입이 벌어진다. 중국이 가장 강성했던 당(唐)나라 때의 쓰촨은 당시의 최고 이민지역이기도 했다. 식량이 풍부한 곳이었으니 중원 등의 지역에서 전란이 벌어지거나 대규모의 가뭄과 홍수로 재해가 발생했을 경우 굶주린 사람들의 행렬이 이곳 쓰촨을 향하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  
 

아울러 당나라 이후 활발하게 벌어지던 서역(西域)과의 교역이 전란 등으로 인한 실크로드 중단 등의 국면을 맞을 때는 쓰촨을 통해 티베트 고원~인도~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또 다른 실크로드가 열리기도 했다. 이를 통해 고비와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가는 북부 실크로드 대신 쓰촨 경유의 남부 실크로드가 열리면서 새로운 인구의 유입은 더 활발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몽골의 원(元)에 저항하면서 남부지역까지 밀렸던 남송(南宋) 때의 전쟁, 만주의 청(淸)에 저항했던 명나라 잔존세력의 저항 등으로 쓰촨 일대가 전쟁터로 변하면서 인구가 급감하는 현상도 빚어졌다. 그런 전쟁을 겪은 뒤 인구가 줄면 반드시 외지의 이민행렬이 이어졌고, 왕조가 나서서 인근의 후난(湖南), 후베이(湖北), 광둥의 인구를 쓰촨으로 대거 이동시키는 조치도 취해졌다.  
 

이는 결국 쓰촨의 끊임없는 인구 이동, 그리고 각기 다른 지역의 문화가 한 데 서로 크게 섞이는 혼융(混融)의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에 따라 쓰촨은 다양한 지역의 문화와 인구가 크게 어울리는 지역으로 유명했다.
 

시인 이백(李白)과 소동파(蘇東坡), 그리고 덩샤오핑

   

중국 역대 시단(詩壇)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을 꼽으라면 한국인의 상당수는 우선 이백, 즉 이태백(李太白)을 꼽을 것이다. 그 이백이 바로 쓰촨 사람이다. 그의 출생에 관한 이설은 많다. 그러나 이백이 어쨌든 지금의 쓰촨 북부 장여우(江油)라는 곳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점은 분명하다.

 


- 쓰촨 장여우에 있는 시인 이태백의 생가. 그는 푸른 눈을 지닌 서역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또한 외지에서 이주한 사람의 후손이다. 일설에는 그가 푸른 눈동자를 지닌 서역(西域)의 혈통을 지녔다고 한다. 그의 시세계는 화려하다. 기존의 중국 당나라 때 시단의 상상력 범주를 훨씬 뛰어넘는 풍부하고 화려한 시재(詩才)를 자랑한 천재적 시인이다.  
 

호방함의 크기와 상상력의 분방(奔放)한 뻗침은 그의 특기다. 서역의 혈통을 지녔다는 점을 따져 그 시세계의 원천을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는 어쨌든 쓰촨의 문화가 낳은 희대의 시인이다.  
 

북송(北宋) 시기의 대표적인 문인 소동파 또한 쓰촨 사람이다. 시와 사(詞)라는 장르에서 그가 펼쳐보인 문재(文才) 또한 이백에 못지않을 정도다. 그의 문학세계의 큰 특징은 원융(圓融)과 회통(會通)이다. 모든 것을 섞어서 대담한 세계를 새로 펼쳐 보였던 중국 최고 문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벼슬길에서 마주쳤던 여러 번의 좌절과 그로부터 생겨난 인생의 여러 번뇌와 상념을 유가와 불가, 그리고 도가의 유불도(儒佛道)라는 정신세계로 섞고 휘저어 달관(達)의 경계로 올렸던 사람으로 유명하다.  
 

이들보다 앞서 이름을 떨친 사람은 사마상여(司馬相如)다. 진(秦)나라에 이어 등장한 한(漢)대에 부(賦)라는 문학 장르에서 최고의 문인으로 꼽혔던 인물이다. 그의 정교하면서도 대담한 수식(修飾)은 그 이후의 중국 문단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측천무후(則天武后)도 이곳 쓰촨 사람이다. 중국 역대 왕조의 역사 중 ‘유일한 여자 황제(皇帝)’의 타이틀을 거머쥐었던 인물이다. 잔인한 숙청, 권력을 향한 강렬한 욕망으로 유명하지만 한편으로 측천무후는 담대한 개혁을 이끌어 당시의 국정을 크게 안정시킨 인물로 평가 받기도 한다.  
 

예로부터 파촉(巴蜀)으로 불렸던 쓰촨의 문화는 이들 몇 명의 유명인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기존(旣存), 또는 기성(旣成)의 틀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향해 나간다는 점이다. 아울러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특징도 보인다. 또한 강력한 융합력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도 한 축을 이룬다.  
 

이 글의 맨 앞에서 소개했던 ‘해를 보면 짖는 개’의 이야기는 외지인들이 쓰촨 사람들을 보는 폄하의 시선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쓰촨 사람들은 외부의 시선보다는 자신이 생각한 무엇인가에 더 골몰한다는 얘기도 된다. 자신이 생각해서 옳다고 여겨지면 그 방향으로 곧장 치닫는 성격이라는 얘기다.  
 

파라다이스, 즉 ‘하늘나라’로 풀이할 수 있는 ‘천부지국(天府之國)’은 쓰촨 지역이 풍부한 자원을 갖춘 곳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이 점은 쓰촨의 독특한 매력이었다. 사방이 높은 산과 고원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30만㎢에 달하는 넓은 평원을 형성하고 있어 사람을 늘 먹여 살릴 토지를 제공해준다. 이에 따라 전란과 재난을 맞았던 다른 지역의 사람들은 늘 쓰촨을 향해 움직였다.  
 

그렇게 늘 유입하는 인구는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실어왔고, 쓰촨은 그런 다양하면서 이질적인 문화가 한 데 섞이는 융합을 경험했다. 모든 것이 한 데 섞여 거대한 일체를 이루는 혼융(混融)의 경험은 새로움을 지향하는 혁신(革新)으로 이어졌을지 모를 일이다.
 

쥐를 좇는 고양이에 관한 사고도 쓰촨의 독특한 문화가 만들어낸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산 높고 황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쓰촨은 황제가 머무는 곳으로부터 가까이 있는 지역에 비해 훨씬 자유롭다. 형식의 틀에 갇히지 않으며 실질을 숭상하면서 제가 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실용적 태도가 발달할 수 있는 토양이다.  



- 쓰촨이 낳은 또 다른 자랑거리가 소동파다. 북송의 문단을 휘어잡은 화려하고 호방한 시와 사가 유명하다. 그의 부친인 소순, 동생인 소철과 함께 문장과 시로 이름을 얻어 이 세 부자를 ‘삼소(三蘇)’라고 칭한다. 그를 기리는 청두의 사당 모습이다.

   

그런 실용성은 ‘쥐를 잡는데 왜 고양이의 털 색깔을 따지느냐’는 식의 실사구시(實事求是)적인 태도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 덩샤오핑의 면면은 다 그렇다.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공산당 팔로군(八路軍) 129사(師)를 이끌었던 덩샤오핑은 과감하며 창의적인 전략과 전술로 성가를 드높였다.
   

1950년대 마오쩌둥(毛澤東)의 지시에 의해 반우파(反右派) 숙청을 단행할 때에도 그는 신속하고 과감한 면모를 보였고, 1978년에는 ‘죽의 장막’으로 가려있던 중국을 이끌고 개혁개방에 나섰다. 그가 주창한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인류 초유의 실험이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최소한 세계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혁신으로 꼽힌다.  
 

옛 중국의 파촉, 그리고 현재의 쓰촨은 그런 덩샤오핑의 담대함과 혁신, 그리고 사회주의의 틀에 자본주의를 얹는 과감한 혼융을 낳은 모태(母胎)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덩샤오핑은 단순한 중국 정치인이 아니다. 그는 ‘정치가’요 ‘개혁가’의 타이틀을 얻기에 충분하다.  
 

이제 막 출범한 중국 5세대 권력의 선두주자 시진핑(習近平)이 당 총서기 취임 뒤 선전(深圳)에 있는 덩샤오핑의 거대 동상을 찾아갔다. 덩이 추진했던 개혁개방의 노선을 충실히 이어가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는 충분히 그 목표를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개혁개방은 지난 30년 동안 중국의 흔들리지 않는 지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빈부격차를 비롯한 사회불안, 정치개혁의 지체 등 중국이 당면한 수많은 문제를 두고 시진핑이 덩샤오핑 식의 과감하며 담대한 ‘전환’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거칠 것 없는 실용주의적 사고, 과감한 혼융, 그를 통해 이어졌던 담대한 혁신은 쓰촨의 문화토양이 낳은 덩샤오핑만의 ‘전매특허’이리라는 관측이 우선은 지배적이다.

2013-04-30 17:3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