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귤이 탱자로 바뀌는 곳 - 안후이(1)

(연재 내용이 길어 당분간은 각 성을 몇 부분으로 나눠 싣기로 함)

 

아주 오래전부터 중국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말이 있다. 북쪽을 향해 이곳을 건너면 귤이 탱자로 변한다는 지역이다. 그곳은 바로 회수(淮水)다. 중국 대륙을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지나는 커다란 하천이 두 개 있다. 바로 북쪽의 황하(黃河)와 남쪽의 장강(長江)이다.

 

회수, 다른 이름으로는 회하(淮河)라고도 하는 이 하천은 황하와 장강에 비견할 수는 없으나 제법 큰 강이다. 자주 범람해 때론 재난을 불러오지만, 실제 중국이라는 대륙의 인문적인 환경을 따지자면 자못 상징적인 의미가 큰 강이다.

 

회수, 또는 회하라고 부르는 강의 모습이다. 대개 중국의 남북을 가르는 경계로 간주하는 곳이다.

이곳을 건너면 귤이 탱자로 변한다는 그런 강이다.

 

중국 대륙의 남(南)과 북(北)이라는 경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식생(植生)의 변화가 비교적 명확해 귤을 그 북쪽으로 가져가서 심으면 탱자로 변한다는 곳이다. 단순한 식생의 변화에서만 그쳤다면 이 지역이 지닌 상징성은 떨어질 수도 있다. 중국의 인문적인 환경은 이 남북의 경계로 확연하게 갈라지는 특성이 존재한다. 교통이 발달하고 통신이 지구촌 전체를 한 마을로 연결하는 오늘날의 환경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인구의 이동과 정착이 때로는 생명을 건 모험에 가까웠던 과거의 환경에서는 그랬다는 말이다.

 

중국 문명의 새벽에는 전쟁이 다반사(茶飯事)처럼 일었다. 중국문명의 주류 역할을 담당했던 중원(中原)의 문화가 이 남북의 경계를 본격적으로 넘기 시작한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의 일이다. 중원지역에서 견고해진 문화는 남쪽을 엿보기 시작했고, 때로는 저 멀리의 북방으로부터 치고 내려오는 유목 제족(諸族)의 무서운 침략을 피해 어쩔 수 없이 남으로 도주하는 경우도 있었다.

 

북부의 황하, 남부의 장강 등 중국 최대 하천 사이를 지나는 중간의 강이 회하다.

 

중원지역 세력이 남쪽으로 넘어오는 입구(入口)라고 해야 옳을까, 아무튼 그런 커다란 세력이 남쪽을 향해 내려올 때 거쳐야 했던 중요한 길목이 바로 이 회수 지역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늘 싸움이 붙었다. 우리가 이번에 살피는 안후이(安徽)라는 지역은 남북이 크게 부딪히는 그런 길목에서 나름대로의 독특한 인문적 환경을 키운 곳이다. 안후이는 장강 이남의 강남 문화권과 중원 중심의 북방 문화가 서로 접점을 형성한 곳이다. 회수 이북으로부터 장강까지 대략 남북 570㎞에 걸쳐 있고, 전체 면적은 남한보다 조금 더 큰 13만9600㎢에 달한다. 인구는 2010년 현재 6800만 명에 이른다.

 

 

안후이 북부에는 회하, 남쪽에는 황산이 있다.

중국 최고 명산이랄 수 있는 황산은 안후이의 뚜렷한 상징이다.

 

 

중국의 충청도식 기질

 

안후이가 서쪽으로 연접한 지역이 후베이(湖北)다. 신해혁명의 발발지였던 우창(武昌)이 있던 곳이다. 이 후베이 사람들은 영악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잔꾀로 사람들을 속이는 하늘의 새가 있는데, 그 이름이 구두조(九頭鳥)라고 했다. 이름 그대로, 머리가 아홉이 달렸으니 머리가 매우 뛰어났던 모양이다. 그러나 후베이 사람들에게 이 구두조의 ‘약발’은 먹히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생긴 말이 “하늘에는 구두조가 있고, 땅에는 후베이 사람들이 있다”다. 천상의 머리 좋은 새에 못지않게 후베이 사람들의 꾀가 발달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 판본에서 한 걸음 더 나가는 말이 있다. “그런데도 후베이 사람 아홉이 안후이 사람 하나를 못 당한다”는 말이다.

 

새 버전의 이 말을 누가 만들어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 말을 후베이 사람들에게 들려주면 “쳇, 그런 말이 어딨어”라며 무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구석도 있기는 있지”라며 웃는 사람도 있다. 어쨌거나 하늘의 머리 아홉 달린 구두조를 상대할 만큼 약다고 하는 후베이 사람들 아홉 명이 모여도 안후이 사람 하나를 제대로 이기지 못한다는 말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 말에 담긴 진정한 뜻은 후베이 사람들처럼 안후이 사람이 매우 영악하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직하면서 속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며, 나름대로 고집스럽게 제 할 일만 하는 안후이 사람의 특성을 얘기하는 측면이 크다.

 

그런 점에서 안후이 사람들은 한국의 충청도 사람들과 기질이 비슷해 보인다. 공교롭게도, 충청도 또한 북쪽의 고구려 세력과 남쪽의 신라, 그리고 백제 세력이 힘을 겨뤘던 고대의 큰 전장(戰場)이었다. 중국 중원에서 남쪽으로 뻗으려는 세력이 회하를 넘으며 그곳에 원래부터 살고 있던 남쪽의 세력과 벌인 모질고 긴 전쟁의 현장이 안후이라는 점에서 둘의 환경은 비슷하다.

 

그래서 전체적인 인상으로 볼 때 안후이 사람들은 인근의 사람들에 비해 무색무취(無色無臭)에 가까운 편이다. 후베이와 후난(湖南) 사람들이 강렬한 개성을 뽐내는 데 비해 안후이는 독특하다 할 만한 성향이 좀체 드러나지 않는다. 좀 더 영악해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어느 경우에는 순박하면서 어리석다는 인상에 가깝다. 느려터진 듯이 행동하지만 속으로는 매우 날카로운 판단력을 지닌 충청도 사람과 어딘가 많이 비슷해 보인다. 함부로 제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은근과 끈기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오기를 참고 기다리는 충청도 기질도 안후이 사람들이 품은 인문적 특성과 아주 가까워 보인다.

 


 

안후이의 대표적 민가 모습이다. 흰 벽에 높은 담의 이 민가들은 흔히 ‘휘파 건축’이라고 한다.

안후이의 독특한 인문적 환경이 빚어낸 전통 민가 형식이다.

 

아울러 안후이는 중국 동남부 지역에서 경제발전이 가장 더딘 지역이기도 하다. 농업만 발달했지, 내세울 만한 산업이 없다. 그래서 상하이 등 인근 대도시에 나아가 궂은 일에 종사하다 보니 대도시 지역 사람들로부터 “시골뜨기”라는 핀잔만 얻어 듣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나 그런 시선으로만 안후이를 관찰하면 큰코 다친다. 귤이 탱자로 변하는 이곳은 남북의 부딪힘이 강렬한 만큼 남과 북의 문화가 커다란 범위에서 융합하며 두꺼운 문화적 축적이 생겨난 곳이다. 따라서 그 문화적 토양 속에서 자라난 인물은 심모원려(深謀遠慮)의 책략가, 또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경략가(經略家)의 속성을 띠게 마련이었다.  

2013-05-10 15: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