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귤이 탱자로 바뀌는 곳 - 안후이(2)

조조(曹操)와 관중(管仲)을 낳은 경략가의 고향

 

 

안후이는 지리적인 특성상 회수 이북, 회수 이남과 장강 사이, 그리고 장강 이남 지역의 세 군데로 나뉜다. 회수와 장강이라는 큰 하천이 지리적으로 자연스럽게 안후이 전역을 3등분으로 구획(區劃)하고 지나가기 때문이다. 인문적인 측면에서도 세 지역은 나름대로 특성을 띤다.

 

우선 회수 이북을 보자. 이곳은 동북쪽으로는 산둥(山東)과 접해 있고, 서북으로는 전통적인 중원지역에 해당하는 허난(河南)과 닿아 있다. 따라서 안후이의 회수 이북 지역은 중원 또는 산둥의 동이(東夷)문화와 같은 맥락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다. 아울러 북쪽으로부터 남진(南進)하는 세력과 직접 부딪히는 빈도가 잦았던 곳이다. 따라서 이 지역 출신들은 전통적으로 북쪽에서 세워진 통일왕조, 또는 중원의 주류 문화와 직접적인 연계를 맺거나 그 중심으로 들어가 이름을 떨치는 경우가 많았다.

 

우선 조조라는 인물이 이곳 출신이다.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잡다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는 동한(東漢)의 왕실이 망한 뒤 벌어진 삼국시대의 가장 뛰어난 영웅이다. 그는 당시 패국(沛國)이라는 지역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보면 안후이 화이베이(淮北)시다.

 

조조의 초상

 

그에 이어 위(魏)의 황실을 세운 조비(曹丕), 그 밑의 동생으로서 중국 문단에 휘황찬란한 족적을 남겼던 조식(曺植)이 모두 이곳 출신이다. 회수 이북 지역의 지리적 또는 인문적 특성을 따진다면 조조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도 이곳에서는 많은 인물들이 출현했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중국 철학의 흐름에서 공자(孔子)와 함께 거대 흐름을 형성한 도가(道家) 사상의 창시자 노자(老子)와 장자(莊子)가 이곳 출신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일설에는 노자와 장자가 서북쪽의 허난 남부 지역 출신이라고 한다. 지리적으로 안후이 북부지역과 닿아 있음은 물론이다. 지금의 구역 경계로 보면 이들 인물들의 출신지역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회수 이북과 중원의 남쪽이 서로 어우러졌던 과거 중국의 인문적 환경을 두고 보자면 그 논란의 의미는 그리 크지 않다.

 

부친 조조의 권력을 승계해 위나라를 세운 문제 조비의 초상

 

안후이 회수 이북 지역이 노자와 장자를 통해 서북쪽의 허난과 어우러진 것에 비해, 동북쪽인 산둥과는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라는 인물을 통해 이어진다. 두 인물은 우리에게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알려져 있다.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중국 춘추시대에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을 보필해 그를 춘추의 패권자로 등극케 했던 두 주인공 말이다.

 

그들은 제나라 환공을 본격적으로 보필하기에 앞서 깊은 우정을 쌓은 친구로 만나 난세(亂世)의 혹심한 경쟁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알아주고 격려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친구 사이의 깊은 우정을 이야기할 때 그 모델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포숙아의 고향에 관한 이설(異說)은 있으나, 관중이 이 회수 이북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관중(왼쪽)과 포숙아

 

관중은 어렸을 적 고향을 떠나 동북쪽인 동이(東夷) 문화권의 산둥으로 진출해 춘추시대의 가장 위대한 패업을 이룬 제 환공의 일등공신으로 역사 속에서 이름을 알린 인물이다.

 

고대의 싸움이 불붙었던 흔적은 어디 있을까. 여러 가지를 다 거론할 필요가 없다. 진시황(秦始皇)의 왕조가 패망한 뒤 천하의 패권을 다투던 두 영웅을 기억하시는지. 바로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다. 두 사람의 싸움 결말은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항우가 자신의 애인인 우미인(虞美人)이 죽자 장렬하게 마지막을 장식한 곳, 아울러 그 항우의 군대를 둘러싼 사방에서는 초나라 노래가 울려 퍼졌다는 곳을 떠올리면 좋다.

 

장막 속에서 우미인과 마지막 술잔을 나눈 뒤 자신의 천리마에 올라타 사방에서 부르는 초나라 노래, 즉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절망적인 환경을 향해 칼을 뽑아들고 나가 항우가 죽는 곳이 해하(垓下)다. 그 항우의 마지막 전투 현장이 지금 안후이 쑤저우(宿州)시다. 조조가 태어났다는 화이베이 바로 남쪽에 있다.

 

항우가 유방의 군대에 몰려 마지막 결전을 벌이다 숨졌다는 해하의 유적지다

 

아울러 북방 유목계 민족이 중원에 세웠던 전진(前秦)과 그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온 동진(東晋)의 왕조가 중국 전역의 패권을 두고 크게 싸움을 벌였던 비수지전(淝水之戰)의 현장은 화이베이와 쑤저우로부터 더 남쪽으로 내려 온 지금의 화이난(淮南)시 인근이다.

 

어쨌든 남북의 문화와 정치적 힘이 격렬하게 부딪히며 많은 다툼을 낳았던 회수 이북의 지역에서 조조와 관중이라는 인물이 나왔다는 점은 ‘그저 그럴 수도 있겠지’라며 그냥 넘기기에는 뭔가 아쉽다. 조조는 한 왕실의 명맥이 스러져가는 무렵에 나타나 천하의 패권을 걸고 동남쪽의 오(吳)나라 손권(孫權), 서남쪽의 촉한(蜀漢) 유비(劉備) 등을 압도했던 난세(亂世)의 영웅이다.

 

관중은 또 누군가. 지략(智略)과 경략(經略)의 대명사인 그는 중국 문명이 조숙(早熟)함을 향해 다른 문명체에 비해 훨씬 큰 걸음을 내디뎠던 춘추전국(春秋戰國)의 시공(時空)에서 가장 뛰어난 경세가(經世家)로 자리매김한 인물이다. 그가 남겼다는 『관자(管子)』는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經國)과 백성을 부유케 한다는 제민(濟民)의 방도를 다룬 사유체계 중에서 가장 으뜸이라고 꼽히는 저작이다.

 

관중의 사유를 담았다는 책 <관자>

2013-05-13 16:28: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