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귤이 탱자로 바뀌는 곳 - 안후이(3)_끝

주중팔을 일깨운 주승이라는 은자의 한 마디


다음은 회수 이남~장강 이북이다. 이곳 출신 중에 가장 이름이 높은 인물은 주원장(朱元璋)이다. 그 이름은 우리 귀에 아주 익숙하다. 그의 본명은 주중팔(朱重八)이다. 그는 역사적 비중이 매우 높은 인물이다. 중국 역사에서 그의 이름은 귀에 쟁쟁할 정도로 많이 들린다.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에 명(明)나라를 건국했다는 점, 그래서 지금 중국의 원형(原型)을 만들었다는 점, 아울러 매우 잔악한 방법으로 공신(功臣) 등을 대거 살육함으로써 왕조의 기틀을 닦았다는 점 등이 모두 그렇다.


명나라 건국의 황제 주원장 초상. 실물은 매우 험악한 인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탁월한 왕조의 창업자였다. 몽골족 치하의 원(元)이 물러나고 중국의 판도가 대 혼란으로 빠져든 와중에서 거지와 무뢰배로 전전하다가 모든 경쟁자를 물리치고 천하의 대권을 잡았으니, 전략(戰略)을 다루는 범주에서는 가히 초인적이랄 수밖에 없다.

그가 창업을 바로 눈앞에 둔 시절 누군가를 찾아 나선 적이 있다. 천하의 대권은 눈앞에 왔으나 그를 확실히 제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그가 이름을 알아내 찾아간 사람은 주승(朱升)이라는 은자(隱者)였다. 세상의 욕망이 뿜어내는 속진(俗塵)을 피해 산간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런 사람 말이다.

주원장은 천하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에 대한 방략(方略)을 주승에게 물었다. 몇 가지 대담을 주고받았을 터지만, 지금 전해지는 기록으로는 주승이 주원장에게 전한 말은 아주 간단하게만 남아 있다. “성을 높이 쌓고, 식량을 많이 모으고, 선포식을 늦추라”는 말이었다.

한자(漢字)로 적으면 아홉 글자다. ‘고축장(高築墻), 광적량(廣積糧), 완칭왕(緩稱王)’이다. 대세(大勢)를 형성했으나 아직 지방 군벌(軍閥)이 남아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 그래서 명분보다는 실질에 주목하며 더 힘을 쌓아야 하는 상황. 명나라 건국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아직 결정적인 무엇인가가 부족했던 주원장의 그런 처지를 꿰뚫어 본 가르침이었다.

주원장은 결국 주승의 말을 따른다. 자신의 군대가 머무는 곳의 축성(築城) 작업에 몰두하는 한편 군량과 무기 등 기초적인 부분을 더욱 보강한다. 아울러 섣부른 ‘창업 선포식’을 뒤로 미루고 형세(形勢)를 치밀하게 살피면서 때를 기다린다. 마침내 주원장은 어느 누구도 견줄 수 없는 힘의 구축에 성공해 대륙의 풍운(風雲)을 질타하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이 두 사람, 주원장과 주승은 같은 주(朱)씨이면서 함께 지금 안후이를 고향으로 둔 이력의 소유자다. 특히 아명(兒名)이자 본명(本名)이 주중팔이었던 주원장은 회수 이남의 지금 펑양(鳳陽)이라는 곳이 출생지다. 주승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나 그 역시 안후이에서 태어나 천하의 권력을 쥘 경략에 관한 지혜를 소유한 사람이다. 우리에게 아주 친근한 중국 인물이 한 사람 있다. 바로 판관 포청천(包靑天)이다. 그의 본명은 포증(包拯)이다. 북송 시기의 명판관으로 이름을 날린, 중국 역사에서 대중적인 이름이 가장 높은 청관(淸官)이다. 우리에게 드라마 ‘판관 포청천’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고향은 회수 이남, 장강 이북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지금의 안후이 성 도회지가 있는 허페이(合肥)다.


안후이의 자랑인 포청천의 초상. 역대 벼슬아치 중 가장 청렴하며 공정한 인물로 꼽힌다.


중국 근대기인 청(淸)나라에 오면 안후이에 동성파(桐城派)라는 문맥이 생긴다. 청대를 주름잡았던 가장 유명한 문인 그룹이다. 이들의 특색은 화려한 문장보다는 졸박(拙樸)한 고문(古文)에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사유를 담는 것으로 유명했다.

동성파가 차지하는 중국 문언(文言: 옛 문장) 문학에서의 비중은 매우 높다. 소박한 문장에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먼저 다뤘던 지향(志向) 때문이다. 아마 동성파의 이런 특징은 권세와 불의에 굽히지 않으며 백성을 위한 판결을 주도한 포청천의 맥을 잇고 있는 듯하다.

헨리 키신저의 근작(近作) 『On China』 초반부에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중국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이홍장(李鴻章)이다. 청나라가 서구 열강의 도전을 받아 흔들리던 19세기에 안후이의 허페이에서 태어나 청 제국 최고의 권신(權臣)으로 활동하면서 쓰러져가는 중국의 국운(國運)을 어떻게 해서든지 유지해보려고 했던 전략가다.


청나라말의 최고 권신 이홍장. 헨리 키신저는 그를 뛰어난 전략가로 묘사했다.


헨리 키선저는 저서『On China』에서 이 이홍장이라는 인물을 경이(驚異)의 시선으로 보고 있다. 근대 과학과 무기로 무장한 서구 열강의 침입을 당하면서도 당시 그들 열강에 비해 아주 초라한 봉건왕조의 국력으로 대응하면서, 세계를 차분하게 지켜보는 전략가의 시선으로 담대하면서도 치밀한 계책을 구사했던 인물로 묘사한다.

이홍장은 그만한 인물이다. 그로부터 청나라의 마지막 힘의 보루였던 북양군벌(北洋軍閥)이 태동하고, 서양 열강을 다른 서양 열강의 힘으로 제압하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략이 본격 펼쳐진다. 그로 인해 청나라는 급격한 몰락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게 당시의 상황을 지켜본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삼국시대 이곳은 오(吳)에 속하는 땅이었다. 그 오나라의 가장 유명한 전략가, 명장(名將)으로 손꼽히는 사람이 주유(周瑜)다. 오나라 손권(孫權)을 도와 북으로 강력한 군사력의 위(魏)에 맞서면서 서남의 유비가 이끄는 촉한(蜀漢)과 때로는 연합하며, 때로는 다툼을 벌였던 불세출의 군사 전략가다. 이 주유 또한 지금의 안후이 성 도회지 허페이의 교외 지역 출신이다.

주유와 함께 활동했던 노숙(魯肅)이라는 인물도 마찬가지다. 그는 회수 이남~장강 이북의 안후이 중부 지역 동쪽에 자리 잡은 딩위안(定遠)이 고향이다. 그 또한 뛰어난 군사 전략가로 알려져 있다. 제갈량(諸葛亮)에 앞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낸 인물이다. 지략의 운용에서 제갈량에 한 수 앞선다는 평을 듣는 사람이다.

회수 이남은 이 몇 사람의 출신자들로 모든 특성을 다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회수 이북은 같은 안후이에 속해 있으면서도, 북방의 허난과 산둥 등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문화지대다. 그에 비해 회수 이남은 오랜 역사시기 속에서 지속적으로 북방에서 내려온 이민자들과 원래 거주자들이 한데 섞였던 융합지다.


산골에서 자라난 천재 비즈니스맨


안후이 북부와 중부, 즉 회수 이북과 이남 지역의 특성은 그렇다. 큰 전쟁이 자주 벌어졌으며, 북으로부터 남쪽으로 이동하는 인구들이 거쳐 가야 했던 지역이다. 북부의 중원 및 산둥 동이 문화와 남방의 유현(幽玄)한 문화를 서로 이어가며 나름대로 독특한 인문을 발전시킨 흔적이 많다. 그러면서도 전쟁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 많이 눈에 띈다.

북부 및 중부지역과는 다르게 안후이 남쪽 끝의 장강 이남 지역은 이른바 휘파(徽派)라고 부르는 특별한 문화를 낳았다. 찻잎과 벼루, 먹을 생산하는 인문적 산업환경에 외지를 향해 부지런히 진출한 상업적 속성도 갖췄다. 이곳의 주택 양식은 매우 독특해 ‘휘파 건축’이라는 독자적 영역을 만들었다.


안후이 남부 지역의 문화를 일컫는 휘파의 건축 중 뚜렷한 특징인 정문 양식 모습이다. 휘주 사람들은 왕성한 비즈니스 활동으로 화려한 건축 양식을 만들어냈다.


안후이라는 명칭은 지금의 안칭(安慶)시와 후이저우(徽州)의 앞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이 후이저우는 송나라 때 이미 부(府)라는 큰 행정단위가 들어섰을 만큼 지역 일대를 대표하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의 가장 대표적인 ‘상품’은 바로 휘상(徽商)이다.

안휘 남부, 즉 후이저우 일대 출신의 상인그룹을 지칭하는 이 휘상은 중국을 대표했던 비즈니스맨 그룹이다. 적어도 중국 명(明)과 청(淸)의 왕조 시기 500년 동안 이 휘상은 ‘중국에거 가장 돈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말을 들었다. 북쪽 산시(山西) 출신 비즈니스맨을 일컫는 진상(晋商)과 함께 휘상은 가장 대표적인 중국 기업인들이었다.

그 휘상의 간판급에 해당하는 인물이 호설암(胡雪巖 본명 胡光墉)이다. 그는 청나라 말기에 가장 눈부시게 활동한 중국 최고의 부자다. 관(官)을 끼고 비즈니스를 하면서 태평천국(太平天國) 등 내란이 벌어졌을 때 군대가 필요로 하는 식량과 군수물자를 조달하면서 성장했다.

이어 '전장(錢莊)'이라고 하는 금융업에 손을 대 중국 No 1의 재력 소유자로 컸다.


안후이, 휘주문화가 낳은 가장 유명한 부자 호설암의 초상.


그뿐이 아니다. 이곳 출신의 비즈니스맨을 일컫는 휘상 그룹은 명나라 때 소금 판매업에 손을 대 큰돈을 벌어들였고, 이어 후이저우 일대의 산악 지대에서 나오는 유명 찻잎을 전국 각지에 공급하면서 떼돈을 벌었다. 특히 산간벽지가 많아 물산이 부족한 관계로 공부에만 매진해 과거에 급제한 뒤 중앙 관계(官界)에 진출한 동향 출신들과 결탁해 소금 등 정부 통제 물자 등을 자신의 비즈니스 대상으로 만드는 데 탁월한 재주를 발휘했다.

이들이 벌어들인 막대한 부는 후이저우 일대의 화려한 건축으로 남아 있다. 특히 고향 출신자의 행적을 기리는,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정문(旌門)이라고 할 수 있는, 화려한 패방(牌坊)이 즐비하다. 아울러 뛰어난 공예 솜씨를 볼 수 있는 나무 조각 등도 유명하다. 또 중국 최고 품질을 자랑하는 붓과 벼루, 먹 등이 이곳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져 중국 전역에 퍼졌다.

지금은 경계가 남쪽의 장시(江西)에 들어가 있으나, 같은 후이저우 문화적 배경을 타고 태어난 사람이 주희(朱熹 또는 朱子)다. 그는 이 지역의 인문적 분위기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1919년 5.4운동을 이끈 문화적 선구자 후스(胡適)도 이곳 출신이다.

청나라 때 중국 최고 부자였던 호설암의 고향은 후이저우 경계에 속한 지시(績溪)다. 지난 10년 동안 공산당 총서기로 중국을 이끌었던 후진타오(胡錦濤)의 원적지가 바로 이 지시다. 호설암과 같은 성이어서 서로 혈연이 있을 것으로 짐작은 하나 아직 밝혀진 내용은 없다.

안후이 출신으로 새 중국 권력 정점에 선 사람은 리커창(李克强)이다. 그는 3월에 열릴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를 통해 중국 권력 2위위 총리에 오를 예정이다. 그는 주원장과 동향이며, 어린 시절 삼국시대 오나라의 유명 전략가였던 노숙의 고향에서 자랐다.


중국의 근대화를 촉발한 5.4운동의 주역 호적(왼쪽)과 2002년부터 10년 동안 중국 공산당을 이끌어왔던 최고 지도자 후진타오. 둘 모두 휘주의 문화적 맥락을 지니고 태어난 인물이다.


지난해 11월 공산당 당 대회에서 비록 최고 권력 7인 상무위원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강력한 개혁 성향으로 중국 정치권의 스타로 자리 잡은 왕양(汪洋)도 초한지의 주역 항우가 마지막 결전을 펼쳤던 해하의 싸움터 출신이다. 다양하면서 화려한 중국의 전통이 이들 현대 중국인들에게 어떻게 이어지며 발현(發顯)하는가를 지켜보는 일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2013년 중국 총리 자리에 오른 리커창(왼쪽)과 개혁의 선봉으로 두각으로 나타내고 있는 왕양 중국 공산당 정치국원. 안후이가 배출한 5세대 중국 권력의 핵심 인물이다.


2013-05-20 15:5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