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중국 지식인의 운명을 돌아보게 하는 곳 - 후베이(1)

이번에는 우선 시 한 수 읊고 시작해보자. 우리에게도 아주 친숙한 시다. 당나라 시인 최호(崔顥 704~754년)의 작품이다. 이미 나이가 지긋한 세대는 고등학교 시절 한문 교과서에 실렸던 이 시를 어렴풋하게 기억할 수 있다. 제목은 황학루(黃鶴樓)다.


옛사람 이미 황학을 타고 훌쩍 떠나가니,

昔人已乘黃鶴去

이곳에는 덩그러니 황학루만 남아 있다.

此地空餘黃鶴樓

황학은 한 번 가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고,

黃鶴一去不復返

흰 구름만 천년 동안 하릴 없이 떠돈다.

白雲千載空悠悠

맑은 날 강 건너 한양 나무들 또렷한데,

晴川歷歷漢陽樹

싱그러운 풀밭은 앵무새 섬을 덮고 있다.

芳草萋萋鸚鵡洲

해가 저무는데 우리 고향 어디쯤 있을까,

日暮鄕關何處是

물안개 강 위에 피어올라 나는 시름겹다.

煙波江上使人愁

 

후베이 우한의 황학루 모습이다. 원래의 건물은 아니고, 나중에 다시 개축했다. 수많은 시인과 문인들이 이곳을 찾아 숱한 글을 남겼다.  

  

 

번역은 국내 당송(唐宋) 시가(詩歌)문학의 최고 권위자인 지영재 전 단국대 교수가 편역한 『중국시가선(中國詩歌選)』(을유문화사)의 내용을 그대로 옮겼다. 지영재 교수의 소개에 따르면 이 시가 쓰여진 황학루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온다.   
 

  
지영재 교수가 편역한 <중국시가선>. 당송시와 사 등 중국 시가에 관한 가장 권위있는 번역서다.


옛날 그곳에 ‘신(辛)씨 주막’이 있었다. 어느 날인가 한 사람이 찾아오더니 “술 좀 얻어마시자”고 했다. 주인 신씨는 큰 사발로 대접했다. 그러기를 반년이었다. 그럼에도 주인 신씨는 싫다는 내색을 하지 않고 그 사람이 찾아오면 아무런 말없이 술을 내 대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은 “그동안 잘 대접해줘서 감사하지만 밀린 술값을 낼 돈이 없다”고 하면서 그 주막의 벽에 노란 두루미 한 마리를 그려 주고는 떠나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술집의 손님들이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면 벽의 두루미가 춤을 추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그 소문이 돌면서 신씨 주점은 크게 번창했다. 10년쯤 지나자 신씨는 백만장자가 됐다. 어느 날 그 사람이 다시 슬며시 나타났다. 피리를 꺼내어 부니 흰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노란 두루미가 벽에서 튀어나왔다. 그 사람은 두루미의 등에 걸터앉아 구름을 타고 날아갔다. 그 사람은 신선이었던 것이다.

시가 쓰여진 황학루는 절경(絶境) 속에 우뚝 서 있다. 서쪽으로부터는 도도한 장강(長江)의 물결이 마치 먼 하늘에서 흘러내려오는 듯한 느낌을 주고, 건너편으로는 북쪽에서 발원해 장강의 큰 물길에 합류하는 한강(漢江)의 흐름이 눈에 들어온다. 먼 곳의 첩첩한 산과 길고 긴 장강, 또 그와는 다른 물 색깔을 지닌 한강이 합류하는 경치다.  

최호의 시는 그런 절경 속에서 탄생한 절창(絶唱)이다. 그런 절경을 품고 또한 그런 절창을 낳은 곳이 우리가 이제 이야기를 시작하는 후베이(湖北)다. 시가 탄생한 곳은 그 후베이의 성 도회지인 우한(武漢)의 장강 기슭에 세워진 황학루다.  

한국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은 아니지만, 이곳은 몇 가지 이름 때문에 우리에게 제법 친숙한 감을 준다. 우선 우한의 구역 명칭 중 하나인 한양(漢陽), 그리고 그 이름을 낳게 했던 물길인 한강이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옛 이름인 한양과 그곳을 지나는 한강이라는 이름이 이곳에 보란 듯이 존재하니 우리에게는 그리 낯설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우한을 흐르는 장강. 건너편으로 흘러드는 게 바로 한강(漢江)이다.  


아울러 중국의 장구한 봉건 왕조 체제를 허문 신해(辛亥)혁명도 이곳에서 벌어졌다. 1911년 우창(武昌)의 기의(起義)로 시작한 조그만 반란이 2000년이 훨씬 넘는 중국의 왕조사를 전복해버렸으니, 이곳은 현대 중국의 등장을 알리는 역사적인 무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을 문화적인 컨셉트로 이야기한다면 ‘형초(荊楚)’다. 현대의 후베이 성 도회지인 우한은 우창과 한양, 그리고 한커우(漢口)의 세 구역이 합쳐져 만들어진 이름이다. 우한이 현대 후베이 지역의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된 셈이지만, 과거의 전통적인 맥락에서 이곳의 실질적인 구심점은 징저우, 우리식으로 읽으면 형주(荊州)에 있었다.  

형주라는 곳은 유비(劉備)와 조조(曹操), 손권(孫權) 등이 활약했던 『삼국지(三國志)』의 중요한 무대였다. 유표(劉表)라는 인물이 지키며 동쪽으로는 오(吳)나라, 서쪽으로는 촉한(蜀漢), 북으로는 조조의 위(魏) 등 삼국의 중간에서 군사적 요충으로 작용했던 곳이다.

‘형초’라는 문화적 맥락 속의 이름 중 뒷글자인 초(楚)는 그로부터 훨씬 이전의 문화를 말해주는 글자다. 춘추(春秋)시대는 기점으로 따지자면 지금으로부터 27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비가 유표에게 몸을 의탁했던 곳, 형주의 옛 성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강릉(江陵)으로 불렸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의 중국은 어땠을까. 지금처럼 광역의 중국은 아니었다. 이른바 중원(中原)이라고 일컫는 극히 작은 지역이었다. 장강 남쪽으로는 결코 세력을 뻗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북쪽의 중원 지역에서 볼 때 장강 인근의 남쪽 사람들은 ‘오랑캐’에 불과했다. 

북녘에 머물고 있던 중국인들은 사서(史書) 등에 그 남쪽 오랑캐들을 ‘남만(南蠻)’으로 적었다. 몸에 문신(文身)을 새기고, 머리카락은 아주 짧게 자르며, 옷을 비롯한 의관(衣冠)을 제대로 걸치지 않는 미개(未開)의 문명이라 여기며 자신들과는 다른 이류(異類)라고 간주했다. 

북쪽의 중국인들이 업신여겼던 존재, 장강 이남에 거주하면서 제대로 옷을 입지도 않고, 뱀을 잡아먹으며, 머리는 짤막하게 잘라버리고, 아프리카 원주민들처럼 몸에 색깔을 칠하고 새기는 그런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형성한 국체(國體)로 가장 강성했던 존재가 바로 초(楚)나라다. 후베이는 그렇게 형주의 전통과 훨씬 이전의 초나라 전통을 담고 있는 곳이다.

 

 

 

**추천** 유기자의 한자칼럼(한자 치고 중국어 잡기)  
 

 

2013-05-24 17:2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