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중국 지식인의 운명을 돌아보게 하는 곳 - 후베이(2)

분방한 상상력이 움트는 곳

   

초나라 사람 중에 크게 이름을 남긴 인물이 있다. 초나라 장왕(莊王)이다. 그는 춘추시대 중원을 향해 세력을 뻗고자 했던 국왕이다. 왕실의 구성원으로 태어나 비교적 순탄하게 왕위에 올랐으나, 대중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뚜렷한 업적을 쌓지 못했다. 적어도 초기에는 그랬다.  


후베이와 쓰촨 사이를 흐르는 삼협(싼샤)의 장강이다. 길고 깊은 강, 그리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들 속의 신비감은 옛 초나라 문화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사람들은 주변의 작은 국가들을 통합하면서 새롭게 북쪽 중원의 국가들을 향해 세력을 뻗어야 할 초나라 미래를 떠올리며 그의 무기력함을 탓하고 있었다. 장왕은 그럼에도 나날이 손에 드는 게 술잔이요, 사람을 불러 모아 치르는 일이 파티였다. 그는 나날이 술과 음악, 그리고 미녀에 둘러싸여 세월을 허송했다.

간언을 하는 신하들이 귀찮아 방문 밖에는 ‘잔소리하는 신하는 모두 목을 벤다’라는 경구까지 써놓았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숨을 건 신하 한 사람이 그의 방문에 들어섰다. 장왕의 방탕한 생활이 3년을 넘어갈 무렵이었다. 그리고 퀴즈를 냈다. “어느 산에 새 한 마리가 있는데, 울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무슨 새인지 아십니까?”  
 

그러자 장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답을 했다. “그 새는 한 번 울면 세상 사람 모두를 놀라게 할 것이고, 한 번 날아오르면 즉시 하늘 높이 솟구칠 것이요.” 중국인이 요즘에도 성어로 자주 사용하는 ‘일명경인(一鳴驚人), 일비충천(一飛冲天)’에 얽힌 일화다.  
 

그 후에는 상황이 180도로 반전했다. 술과 음악, 미녀에 둘러싸여 세월을 보냈던 장왕이 급격히 변신했던 것. 그는 3년 동안 은밀하게 조사했던 자료를 토대로 간신을 몰아내고, 국정의 걸림돌들을 제거했다. 주변을 통합한 뒤 그는 북방으로 기운을 뻗쳤다. 춘추시대 남쪽에서 일어난 야만의 초나라는 드디어 가장 강성한 패업(霸業)의 국가로 발돋움했다.



수많은 호박(湖泊)과 소택(沼澤)이 곳곳에 널린 땅, 옛 초나라의 정서는 어땠을까. 우한의 유명 호수 둥후(東湖)의 전경을 찍은 사진이다.

   

초나라는 그 문명의 바탕이 황하 유역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중원의 문명과는 조금 다르다. 그 원류(原流)에 관한 논의는 아직 중국 역사학계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그럼에도, 초나라의 바탕이 황하문명과는 다를 것이라는 점에는 연구계의 많은 이가 동의한다.
 

우리는 그런 단초를 초나라 장왕이 활동하던 무렵인 춘추시대 초반의 여러 정황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초나라 문명 바탕에 관한 세부적인 논의는 여기에서 다루기 힘들다. 더 많은 지면이 필요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로부터 몇 백 년이 흘러 전국시대에 홀연히 이 지역의 역사 마당에 이채(異彩)을 뿜으면서 모습을 드러내는 이가 있으니, 우리는 이 사람을 통해 조금 색다른 이야기를 펼쳐갈 수 있다 .

그의 이름은 굴원(屈原)이다. 기원전인 BC340년 지금의 후베이 쯔구이(秭歸)라는 곳에서 태어나 BC278년에 죽은 인물이다. 그의 고향은 중국의 최대 수력댐인 삼협(三峽)댐 초입에 있다가 담수 작업으로 인해 물에 잠겼다. 옛 이름은 단양(丹陽)이다. 중국 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이 굴원의 이름을 안다. 그는 중국 초기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실명으로 독립적인 문학작품을 남긴 문인으로서는 그가 거의 최초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비운의 중국 지식인 1호에 해당할까. 부정함을 두고 간언을 벌이다가 뜻을 관철하지 못해 강에 몸을 던져 죽은 굴원은 옛 초나라의 상상력과 일탈의 정서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초나라의 관원이었으나 국정에 관한 간언 때문에 왕으로부터, 그리고 동료들로부터 냉대를 받는다. 초반에 그는 초나라 회왕(懷王)의 신임을 받아 승승장구한다. 그가 건의한 대부분의 개혁적 조치들은 현실로 이어지고, 그에 따라 초나라의 국력도 상승한다.
 

그러나 북방에서는 나중에 중국 전역을 통일하는 진(秦)이 약진하면서 초나라를 점차 위협해온다. 그런 진나라의 공작에 휘말려 초의 회왕과 권력자들은 개혁적 관료인 굴원을 멀리한다. 회왕이 진나라 공작 때문에 죽은 뒤 양왕(襄王)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더 나빠진다. 굴원은 35세 때인 BC305년에 지방으로 쫓겨난 뒤 계속 유랑 생활을 하면서 실의에 빠진다.  
 

그는 결국 그런 유랑의 길에서 깊어지는 실의를 견디지 못하고 화창한 봄의 어느 날 강에 투신해 삶을 마감한다.  
 

유랑의 신세로 깊은 좌절감을 이기지 못한 결과였다. 굴원의 작품 ‘어부(漁父)’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곳저곳을 떠돌던 굴원이 어느 강가에서 물고기 잡는 어부를 만났을 때였다. 굴원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된 어부는 “창랑의 물이 깨끗하면 내 갓끈을 씻을 것이요, 창랑의 물이 더러우면 내 발을 씻을 것”이라며 세상과 청탁(淸濁)을 함께 하라고 권유했다.  
 

세상이 깨끗하면 깨끗한 대로, 더러우면 더러운 대로 그냥 어울려 살면 그만이지 어렵게 살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얘기였다. 그러나 굴원은 결국 그런 권유에도 움직임이 없었다. 그는 결국 강물에 투신했고, 물고기의 밥으로 변했다.  
 

그를 기념하는 명절이 바로 단오(端午)다. 세상 사람들은 굴원의 충정(忠情)을 더 높이 샀던 셈이다. 굴원이 빠져 죽은 강가에 사람들은 찰밥을 갈댓잎으로 싸서 강으로 던져 물고기들이 굴원의 살을 뜯어 먹지 않도록 유도했다고 한다. 제 일신의 부귀와 영화만을 추구하지 않고 우국(憂國)의 충정으로 무엇인가를 해보려다가 좌절해 결국 자살을 택한 굴원의 뜻을 높이 기렸던 것이다.  



굴원의 『초사』. 『시경』이 북방 문학의 대표라면 굴원의 이 작품은 남방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분방한 상상력이 화려하게 펼쳐지는 낭만의 정서가 눈에 띈다.

   

그가 남긴 작품은 후대에 편찬한 『초사(楚辭)』로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굴원은 작품 ‘이소(離騷)’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과 그 안에서 우러나온 감정을 적었고, ‘천문(天問)’에서는 지역에서 전승되던 신화와 전설을 풍부하게 인용하면서 자연과 인생의 의미를 물었다.  
 

굴원은 남방문학의 한 상징이었다. 북방의 중국 문학이 『시경(詩經)』을 위주로 그 근간을 삼았다면, 나중에 발달하는 중국의 남방 문학은 굴원의 작품들을 토대로 삼았다. 북방의 대표인 『시경』이 현실적이면서 사실적인 기풍을 품었다면, 남방의 대표인 『초사』는 상상력과 낭만주의 및 이상주의적 색채를 띠었다.

 

 

 

**추천** 유기자의 한자칼럼(한자 치고 중국어 잡기)  
 

2013-05-30 18:4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