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중국 지식인의 운명을 돌아보게 하는 곳 - 후베이(3)

이상주의와 낭만주의적 기질

 

중국의 수많은 옥(玉) 중에서 가장 유명한 옥은 무엇일까. 화씨벽(和氏璧)이다. 이 스토리는 우리에게 제법 많이 알려진 내용이다. 옛 초나라 땅에 변화(卞和)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대단한 옥을 발견했다. 우연히 얻은, 진귀한 옥을 품은 큰 돌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그 돌을 초나라 임금에게 바쳤다. 그러나 왕실에서는 “그저 그런 돌멩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성격이 고약한 왕은 괘씸하다며 변화의 다리 하나를 잘라버렸다. 변화는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임금이 바뀌자 변화는 다시 그 옥돌을 진상했다. 그러나 마찬가지 결과였다.
 

새로 즉위한 왕은 전임자와 같은 형벌을 내렸다. 변화의 나머지 한쪽 다리도 잘려나갔다. 좌절과 실의에 빠졌음은 물론이다. 새로운 임금이 다시 즉위했다. 변화는 그 돌덩어리를 품에 안고 매일 울고 있었다. 새 임금은 “저게 무슨 울음소리냐”고 물었고, 마침내 변화를 데려와 자초지종의 곡절을 들었다.

  

 

중국의 옥 중에서 가장 유명한 옥은 화씨벽이다. 나중에 진시황은 이를 사용해 옥새를 만들었다. 동그란 형태의 위 그림같은 옥을 벽(璧)이라고 적는다. 완벽(完璧)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 화씨벽에서 유래했다.


새로 판정한 돌멩이 속의 옥. 이른바 화씨벽이라고 하는 둥근 형태의 중국 최고 옥돌은 그런 과정을 거쳐 나왔다. 이 화씨의 벽은 금세 중국 전역에 이름을 떨쳤고, 이를 입수한 조(趙)나라가 한 때 진(秦)나라에 빼앗겼다가 인상여(藺相如)라는 인물의 기지와 용기로 다시 그를 들여올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생긴 성어가 ‘완벽(完璧)’이라는 말이다. 화씨벽을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이 스토리 속에 등장하는 변화라는 사람 역시 과거 초나라 땅, 지금의 후베이 지역 출신이다. 그는 왜 다리를 잘려가면서 옥 품은 돌을 바치려 했을까. 당시의 규범에 따라 했을 수도 있으나, 다리가 한 차례 잘리고 이어 다시 남은 다리 한쪽도 잘릴 때까지 결코 가슴에 품은 뜻 하나를 굽히지 않았다.
 

‘내가 진상한 이 돌은 진짜 옥이다’라는 점을 증명코자 했을 것이다. 자신의 신체 일부가 잘려나가는 혹형(酷刑)을 거듭 당했으나, 결국 변화는 그 자신이 품은 뜻을 버리지 않고 기어이 다시 시도하는 자세를 보인다. 두 다리를 모두 잃고서도 제 자신을 제대로 증명하지 못했다는 설움과 분함 때문에 울고 또 울어 결국 새로 즉위한 임금에게 자신의 경우를 알리는 데 성공했다.
 

이 정도면 우리가 정작 주목해야 할 대상은 변화가 왕실에 진상한 옥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 번 품은 뜻을 끝까지 밀고 나가 제가 주장하는 바가 옳다는 점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은 욕망과 지향(志向)이 더 중요해 보인다. 그런 변화라는 인물은 결코 현실적인 사람이 아니다. 어느 정도의 선에서 타협하며 자신의 이익을 건지는 인물은 아니라는 얘기다.
 

화씨벽은 조나라를 거쳐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종국에는 진시황의 손에 들어간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은 그 귀하고 귀하다는 화씨벽을 손에 넣은 뒤 이를 소재로 해서 그 유명한 옥새(玉璽)를 만든다. 옥새는 봉건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대명사로 변했다.
 

왕조의 가장 중요한 결정에 반드시 찍어야 하는 도장, 즉 국새(國璽)의 의미로 정착했다. 단지 그 국새의 의미를 다시 넘어서, 진시황이 만들었다는 옥새는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후대의 왕조가 ‘내가 바로 천하의 주인’이라는 점을 알리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른바 ‘전국새(傳國璽)’다.

   

 

진시황의 옥새는 이런 형태였을 것이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청나라 건륭 때의 국새를 모방한 작품이다. 나라의 정통을 상징하는 옥새의 전통은 우리에게도 남아 있다.


진시황의 진나라에 이어 등장한 한(漢)나라 등 후대의 왕조는 천하의 패권을 잡은 뒤 바로 이 전국새를 찾느라 혈안이었다. 이 전국새를 손에 넣어야만 천하의 패권을 장악하는 작업이 비로소 끝을 맺는다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후일담이다. 우리는 전국새를 암벽의 바위로부터 캐낸 변화라는 인물의 성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가 지닌 뜻을 끝까지 밀고나가는 이상주의적 성향이 바로 그 점이다. 굽히지 않고, 좌절하지 않으며, 비켜가지 않고, 제가 가고자 하는 곳을 향해 우직하게 나아가는 그런 성향 말이다. 옛 초나라 지역, 지금의 후베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그런 성향이 있다.

 

제가 모시는 왕에게 간언을 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유랑의 신세가 되었음에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충언을 올리는 굴원의 기질이 그와 흡사하다. 결국 “물이 더러우면 발을 씻으면 좋은 것 아니냐”는 고기잡이 어부의 충고에도 아랑곳 하지 않다가 강물에 몸을 던져 제 자신의 충절을 지켰던 굴원, 끝까지 제가 캐낸 옥돌을 품에 안고 통곡을 그치지 않았던 변화는 동일한 기질의 인물인 셈이다.
 

굴원에게는 낭만성도 엿보인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소재를 보면 천문(天文)과 신화(神話), 자연 등이 주조를 이룬다. 낭만이라는 정서 영역은 어딘가에 잡히고 맺힌 상태를 거부한다. 성정이 자유분방해 상상력의 공간을 키우며, 자질구레한 소절(小節)에는 얽매이지 않는다.  
 

우리에게 친숙한 ‘지음(知音)’의 고사 속 주인공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도 그런 인물이다. 두 사람은 춘추시대 초나라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백아는 나중에 유비 등이 활동했던 형주, 종자기는 추정컨대 황학루가 있는 지금의 우한 사람이리라. 형주에서 태어났으나 북방의 진(晋)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백아가 어느 날 고향 인근의 지금 우한에 와서 거문고를 탔다.  
 

그는 당대에 이름이 나 있던 거문고의 대가였다. 나무꾼이던 종자기가 백아 못지않은 전문적인 지식으로 그 음악을 경청하다가 결국 “세상에서 내 음을 알아주는 사람(知音)은 당신 뿐”이라는 백아의 고백을 들었다는 얘기다. 이듬해 같은 장소에서 만나기로 다시 약속을 했으나, 종자기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백아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종자기가 병으로 그만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들었다.  
 

 

백아와 종자기라는 인물의 스토리는 ‘지음(知音)’에 관한 고사로 유명하다. 둘의 모습을 상상해 그린 그림이다.

     

백아는 종자기의 유언까지 전해 들었다고 한다. “백아라는 친구가 오면 처음 만났을 때 들려줬던 ‘높은 산, 흐르는 물(高山流水)’의 곡을 죽어서도 듣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백아는 결국 종자기의 무덤을 찾아가 종자기가 듣고 싶어 했던 곡을 연주했다. 그리고 백아는 이렇게 선언했다. “내 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친구가 죽었으니 이제 더 이상 악기를 다루지 않겠다.”  
 

아름다운 스토리다. 세상의 가장 가까운 친구, ‘절친’이 지음이다. 그러나 백아의 기질도 참 흥미롭다. 그 절친이 죽었으므로 음악을 끊고 여생을 살겠다는 그런 다짐 말이다. 극적이며 감동적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낭만적이다. 뜻을 이룰 수 없게 되자 결국 강물에 빠져 죽음으로써 제 충절을 증명하고자 하는 굴원과 일맥상통이다.

 

현대판 굴원, 변화, 백아

 

원이둬(聞一多)라는 인물이 있다. 1899년에 태어나 1946년에 사망한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巨匠)이다. 이 사람 역시 과거 지음의 낭만적 고사가 태어나고, 이상주의적이며 낭만적인 굴원이 숨을 쉬었던 곳, 그리고 가슴에 품은 옥을 끝까지 ‘희대의 보석’으로 지켜냈던 변화가 울부짖었던 초나라의 땅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력은 화려하다. 지금의 후베이 황강(黃崗)에서 태어나 전통적 학문을 익히다가 명문 칭화(淸華)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미국의 시카고 대학과 콜로라도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어려웠던 중국의 사정으로 볼 때 첨단을 걸었던 학력이다.  
 

그는 20세기 초반의 가난하고 병들어 제국주의의 침탈에 허덕이던 중국의 민족적 울분을 대변했으나 정치적으로는 당시 중국을 양분하던 공산당과 국민당에 모두 비판적이었다. 그는 작품 ‘죽은 물(死水)’ 등을 발표하면서 시를 통해 중국이 놓은 절망적인 상황 등을 묘사했으나 정치적으로는 매우 날카로운 비판자였다.  

 

문일다의 생전 모습이다.

 

그의 작품세계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정서는 자유다. 진정한 자유를 쟁취하고자 그는 작품을 통해, 문학비평을 통해 매우 선구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이상적이면서 낭만적이기까지 했던 그의 작품 세계는 따라서 2000년 전의 시공을 넘어 자신의 고향 대선배인 굴원과 큰 연결고리를 형성한다.
 

그는 전통학문에도 조예가 깊었고, 첨단의 서구 문학에도 이해가 깊었다. 학문적인 성과도 뚜렷했으며 중국 현대 문단에의 기여도 매우 높았다. 그러나 정작 그가 주목했던 분야는 현실에 대한 당당한 비판이었다. 그는 공산당 초기 비판자였으며, 1930~1940년대 중국의 판도를 통일할 수 있었던 국민당에 대해서도 가차 없는 비판자였다.  
 

그 또한 현실에 절망했다. 국민당의 부패가 심해지면서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에 쫓겨 서남부의 오지인 윈난(雲南)으로 쫓겨 오는 과정이 그랬다. 그러나 그는 현실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급기야 그는 국민당의 1인자이자 독재로써 중국의 부패를 심화시키던 장제스(蔣介石)가 보낸 자객에 의해 죽었다.

그로부터 읽는 것은 두 가지다. 우선 과거의 초나라 전통을 잇는 오늘날의 중국 후베이 지역 사람들의 낭만적이며 이상주의적인 기질이다. 굴원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성향, 옥을 품은 변화의 굽히지 않는 뜻, 그리고 친구의 죽음 앞에서 거문고의 현을 끊어 버렸던 백아의 기질이 다 들어 있다.  
 

다른 한 가지는 현실의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려는 비판자의 기질이다. 사람 사는 곳이면 현실이 이상 그 자체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현실의 비판자는 늘 등장한다. 그러나 그런 비판자를 수용하고 품는 사회와, 그를 거꾸러뜨려 없애버리는 사회는 다르다. 발전의 동력 자체가 다르다는 얘기다.  
 

오늘 날의 중국은 그런 비판자를 과연 잘 품는 나라인가. 과거의 초나라 지역에 등장했던 뜨거운 비판자들을 오늘의 중국 공산당은 품고 다독일 수 있는가. 굴원이나, 원이둬나 그런 점에서 현대 중국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지식인이다. 중국의 강력한 정치체제 속에서 예나 지금이나 비판적 지식인들이 어떤 길을 걸었는지를 암시한다. 한반도의 문화적 풍토 또한 그런 점에서 예외일 수는 없지만….

2013-06-21 14:5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