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바다를 향하는 가슴의 소유자들 - 푸젠(1)


중국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장강(長江)의 남쪽에는 산과 구릉이 많이 발달했다. 지형적으로 장강 남부 지역이 다양한 혈통과 언어, 인문적 환경을 형성하는 이유는 대개가 다 그런 산지(山地) 때문이다. 산이 깊으면 물길 또한 거센 법이다. 높고 가파른 산과 거센 물줄기에 막혀 사람들은 때론 이웃에 사는 사람들과의 소통을 잊고 스스로의 환경에 갇힌다.

중국 남부의 언어와 문화는 그런 지형의 영향 탓에 아주 갈래가 많다. 산을 하나 넘으면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이유다. 요즘이야 널리 보급된 텔레비전 등의 문명적 이기(利器) 때문에 그럴 까닭이 적지만 어쨌든 과거의 중국 남부는 높고 험준한 산지와 물줄기 탓에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만들어왔다.

중국 동남부에도 그런 커다란 산이 지나간다. 우리는 중첩한 산이 일정한 흐름을 형성하면 그를 산맥(山脈)이라고 부른다. 장강이 흘러지나 바다로 물길을 보태는 상하이(上海)에서도 한참을 지나 남쪽으로 내려오면 닿는 곳이 푸젠(福建)과 장시(江西)다. 이 두 성(省)의 경계를 가르는 산맥이 있으니, 중국인들은 이를 우이(武夷)산맥이라고 한다.



중국 니투왕이 소개하는 무이산의 모습이다. 푸젠을 북부 지역과 확연하게 가르고 지나가는 커다란 산맥이다.

자그마치 길이가 550㎞, 면적은 995.7㎢의 산맥이다. 아열대의 식생(植生)이 가득 자라고, 습기를 잔뜩 머금은 운무(雲霧)가 늘 산맥 전체를 가득 에워 싸 찻잎이 잘 자란다. 중국에서 자라는 찻잎의 종류는 많지만 혹자는 이곳을 일컬어 “중국 찻잎의 본향(本鄕)”이라고도 한다. 실제 이곳이 중국의 장구한 끽차(喫茶) 문화의 본향인지는 더 따져 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종래 크고 우람하며, 가파르고 험준한 우이의 산맥에 막혀 전통적인 중국인의 발길을 막았던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3500여 년 전이면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의 판도를 정한 시점은 물론이고, 춘추전국(春秋戰國)의 시공(時空) 또한 감히 새벽의 여명을 묻기조차 어려웠던 시절이다.

그런 중국 문명의 초기 새벽에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한족(漢族)이라고 부르는 지금의 중국인들과는 혈통 자체가 다른 군체(群體)였다. 중국 사서(史書)에서는 이들을 월(越)로 적으며, 인류학에서는 비에트(Viet)로 통칭한다. 중국 문명의 발아기(發芽期)에 이들은 일찌감치 벼를 지어 주식으로 삼았던 도작(稻作)의 주체였으며, 언어와 혈통으로 볼 때는 오늘날의 중국 문명을 일군 중원(中原)의 제족(諸族)보다는 인도차이나 반도 인근의 베트남과 태국, 또는 미얀마 사람들에 가까운 부류였다.

그 종류가 너무 많아서 중국 사서에서는 이들을 통칭하며 백월(百越)로 적었는데, 여기서 100을 뜻하는 ‘백(百)’은 고정적인 숫자를 일컬음이 아니니, 그 본뜻으로 보자면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다’의 의미다. 중국인들이 ‘정말 셀 수 없다’고 생각한 그 많은 비에트의 한 갈래 중 ‘민월(閩越)’이라는 존재, 이들이 바로 우이의 우람한 산맥 그늘 주변에 거처를 마련하고 살았던 본래의 토착민들이다.



중원의 시각에서는 오랑캐였던 이들의 고향

우리가 이 장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은 지역적으로는 푸젠이라 일컫는 곳이다. 한자로 ‘福建’이라고 적지만, 이는 중국 문명이 새벽을 지나 해가 동천(東天)에 꽤 떠오른 대명천지의 당 나라 때 생긴 이름에 불과하다. 복주(福州)와 건주(建州)라는 곳의 두 행정구역 명칭 중 첫 글자를 각각 떼어내 합성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 훨씬 전의 이곳은 중원 사람들이 경멸해 마지않던 오랑캐의 땅이다. ‘민월’이라는 이름 중의 ‘민(閩)’이라는 글자는 ‘집의 문(門) 안에 벌레(虫)를 키우는 사람’이라는 함의를 지니고 있다. 그 가운데 ‘벌레’는 다른 게 아니라 ‘뱀’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원래 뱀에 관한 토템(totem)이 있었던 모양이다. 뱀을 숭상하고, 또 그를 인체의 운영에 필요한 단백질의 주요 공급원으로 여기는 풍속이 있었던 듯하다.



푸젠의 대표적인 하천인 민강(閩江). 이 강을 경계로 민남과 민북 등이 나뉜다.
인문적 환경이 이 강을 기점으로 크게 갈린다. 언어와 습속이 강 남북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몸에 문신을 새긴다’는 중원의 문명이 자리를 잡기 시작할 무렵 그 지역의 사람들이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의 습속을 깔보면서 ‘남녘의 오랑캐(南蠻)’로 치부할 때 동원했던 형용이다. 우이의 산맥 이남에 살았던 사람들 또한 그런 형용에서 멀리 벗어나 있지 못했을 것이고, 거기다가 뱀을 귀히 여기며 그를 즐겨 잡아먹는 풍속까지 곁들였다는 이유로 이름 머리에 ‘민’이라는 글자를 얻었으리라.

이들이 남긴 유물이 아직 남아 있다. 사람이 죽으면 관에 담아 절벽 등의 틈에 올려놓는 이른바 ‘현관(懸棺)’이다. 이 현관이라는 풍속은 비단 푸젠 지역에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장강의 물줄기를 따라 들어선 험준한 협곡 등에서도 현관은 나온다. 그러나 그 오리지널은 푸젠의 우이 산맥 근처에 있다.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현관이 이곳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로부터 아주 먼 이야기다. 그보다 우리가 중점을 둬야할 대상은 현재의 푸젠을 형성하고, 오늘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중국의 문명은 중원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해 국체를 형성하고, 그를 뒷받침하는 힘을 축적해 사방팔방으로 뻗으면서 제 모습을 갖춰간다.



푸젠 일대와 장강 유역에서 고루 발견되는 현관이다. 관을 절벽의 틈에 놓아두는 장례법이다.
북부 중원과는 전혀 다른 문화현상이다. 원래 중국 남부에 흩어져 살던 원주민들이 남긴 습속이다.



중원의 피바람 불었던 거센 역사의 흐름은 사람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전란은 밥 먹듯이 벌어지고, 그에 따른 살육과 상쟁(相爭)이 도를 넘어서면서 사람들은 늘 그에 쫓겼다. 좀 더 살기 편한 곳으로, 또는 좀 더 살기가 안전한 지역으로 사람이 터전을 옮기는 일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벌어졌으리라.

그러나 전쟁이 늘 불붙어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많은 수의 사람들이 대거 이동하는 일은 얘기가 조금 다르다. 문물(文物)이 그에 묻혀 함께 이동하며, 제도가 그 뒤를 따르고, 문화가 다시 그 꼬리를 물고 옮겨간다. 풍속과 인문의 여러 가지 요소, 언어와 문자도 그 뒤를 따른다. 인구의 대거 이동은 따라서 문화가 전반적으로 확산하는 결과를 빚는다.

중국의 과거 기록에서는 그런 인구의 대거 이동에 따른 문화 전반의 확산을 ‘의관남도(衣冠南渡)’라고 적는다. 옷과 모자를 뜻하는 ‘의관(衣冠)’이라는 단어는 일차적으로 문화의 역량을 갖춘 사대부 계급을 뜻한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문화의 역량을 갖춰 그를 옆의 사람에게 방사(放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어쨌든 그런 ‘의관’의 남쪽 이동은 전란을 피해 다른 곳으로 옮겨 간 수많은 중원지역의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 수많은 인구 이동 중에서도 중원지역이 유비(劉備)와 조조(曹操)가 등장하는 삼국시대를 막 거친 뒤 북방 이족(異族)의 침입으로 대 혼란기에 접어 든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의 이동은 유명하다.

위(魏)나라에 이어 등장한 진(晋)나라는 서기 311년의 회제(懷帝) 때인 영가(永嘉) 5년에 들어서면서 북방 흉노와 선비(鮮卑) 등에 밀려 커다란 혼란에 휩싸인다. 전란이 빗발치듯 다가서면서 중원의 인구는 대거 이동의 길에 들어선다. 이른바 ‘영가의 란(永嘉之亂)’이라고 불리는 일대 사건의 여파다.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으로 중원의 인구는 늘 남쪽으로 이동했다.
왕조의 정부, 그 밑의 사대부들도 함께 쫓겨 와 남방에서 다시 꽃을 피운 경우가 많았다.
그런 집권층 귀족 및 사대부 집단의 인구이동을 ‘의관남도(衣冠南渡)’라고 부른다.



이 때 여덟 가족이 우이 산맥의 남쪽인 푸젠에 들어선다. 여덟 가족은 팔성(八姓)이라고 적으며, 이들이 푸젠에 들어섰다는 사건을 입민(入閩)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함께 병렬해 ‘팔성입민(八姓入閩)’이라고 적는데, 이 게 바로 중원 인구의 본격적인 푸젠 정착기를 알리는 신호탄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는 사서에서 정색을 하고 이르는 말에 불과하다. 사람의 발길은 분명 그런 큰 전란과 상관없이 부지런히 살 곳을 찾아 움직였을 것이다. 그보다 훨씬 전에 좀 더 평안한 곳과 안락한 곳을 찾아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이동했을 것이고, 낯선 곳을 찾아 든 그런 발길은 본래의 거주민들과 만나 나름대로 화학적 결합을 이루면서 독특한 인문을 낳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쪽으로부터 내려온 많은 중원의 인구와 본래 우이의 산자락 밑에 살았던 재래의 거주민들이 만나는 장면은 사서의 기록을 통해 짐작할 수밖에 없다.

2013-06-27 16:5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