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화 이민(移民) 집단이 간직하는 속성 - 푸젠(2)

원래 푸젠에 거주했던 비에트 계통의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일일 테다. 푸젠을 ‘이민의 고향’이라고 부르면 말이다. 그러나 중원 지역 사람들을 중심으로 보자면 푸젠은 이민 집단이 종국에 정착하는 지역이랄 수 있다. 임(林)과 황(黃), 진(陳)과 정(鄭) 등 이른바 ‘팔성(八姓)’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집단이 먼저 발을 들여놓았고, 그 뒤에도 중원에서 벌어진 끊임없는 전란을 피해 그곳의 인구는 먼저 떠난 사람들과의 연고(緣故)를 찾아 늘 발길을 옮겼을 테니 말이다.


아마 푸젠과 그 일대의 원주민은 바로 이 여족이었을 것이다.
원래 이곳을 터전으로 삼아 살아왔던 비에트 계통의 종족.
지금은 어디론가 흩어지고, 섞여 들어 대부분은 ‘한족’으로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제 문화를 유지하는 여족의 모습이다.



푸젠의 언어는 복잡하다. 북쪽의 저장(浙江)보다는 못할지 몰라도, 푸젠 언어의 분포와 습속의 다양함은 꽤 유명하다. 푸젠에는 큰 강이 흐른다. 민강(閩江)이다. 이곳을 기점으로 언어는 남과 북, 동쪽과 중부 지역 등으로 나뉜다. 남쪽은 민남(閩南), 북쪽은 민북(閩北), 동쪽은 민동(閩東), 중부는 민중(閩中)으로 부르며 나머지 다른 어계(語系)를 형성한 말이 포선(蒲仙)이다.

아울러 서남쪽 장시(江西)와의 접경 지역에는 북쪽에서 내려온 또 다른 거대 이동 집단이 정착했는데, 중국에서는 그들을 객가(客家)라고 부른다. 아울러 우이 산맥 자락에서 전통적으로 삶의 터전을 일궜던 것으로 보이는 소수민족 여족(畬族)도 존재한다.

중국의 다른 성(省)처럼 푸젠의 인구 구성은 매우 복잡하다. 그럼에도 푸젠은 이민 집단이 중국 역사 시기 초반부터 발을 들여 놓았으며, 그 이후로도 북쪽에서 유입하는 인구의 발길이 최근까지 늘 멈추지 않았던 곳이다. 따라서 이 지역 사람들의 기질은 엄숙함보다는 분방함에 가깝고, 체제에 순응하기보다는 자신을 억누르는 틀을 거부하는 성정(性情)이 더 발달한 듯 보인다.


푸젠 서남부에 후기에 이주해와 정착한 객가의 촌락이다.
성벽과 같은 담을 쌓은 독특한 주거양식, 즉 토루(土樓)로 유명하다.
여족 등 현지 원주민과 피를 많이 섞은 집단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소개할 푸젠의 인물 한 사람은 이지(李贄)다. 그 본명보다는 호(號)가 더 유명하다. 이탁오(李卓吾)-. 그는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중국 사상계의 가장 격렬했던 이단아(異端兒)다. 공자(孔子) 이래로 펼쳐졌던 유학(儒學)의 관학적(官學的) 틀에서 자유와 해방을 부르짖었던 혁명적 기질의 사상가다.

그는 유학의 고답적이며 형식적인 논리의 틀을 부정한 심학(心學)의 대가 왕양명(王陽明)의 학통(學統)을 이어 받았지만, 그보다 훨씬 진보적인 성향을 보였다. 공맹(孔孟)의 전통적 굴레가 생성한 남존여비(男尊女卑)의 비인간적 굴레를 벗어던지고자 안간힘을 쓴 인물이다. 아울러 왕조의 이데올로기로 껍데기만 남은 유학의 틀을 혁파하고자 했으며, 순수한 마음의 형태인 동심(童心)의 복원과 거짓을 끊고 참으로 돌아가자는 ‘절가환진(絶假還眞)’ 등을 주장한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사상가였던 이탁오의 얼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는 공자와 맹자의 사상이 왕조의 질서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로 중국의 모든 인구를 압박하던 시점에 나타난 ‘중국 사상계의 핵폭탄’에 가까웠다. 누구보다 격렬한 어조로 공자가 지닌 사상의 맹점을 지적했으며, 힐난에 가까운 어조로 유가의 법맥(法脈)을 마구 흔들었다.

공자의 기준은 그가 살았던 시절의 기준에 불과하다며 사상은 시대에 따라 그 기준을 달리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다 백성을 위하기 때문”이라며 엄혹했던 왕조(명나라) 시절에 철저한 민본(民本)의 사상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관원은 백성을 잡아먹는 호랑이로, 옛 호랑이는 수풀 속에 살았지만 이제는 관아(官衙)에 버티고 있다”며 왕조 체제를 직접 비판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사상계의 평어(評語)는 화려했다. “그의 뼈는 쇠붙이와 돌처럼 단단했고, 펼치는 기세는 하늘에 닿았다. 말을 함에 느끼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토하듯 내뱉었고, 그 뜻은 가서 펼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는 식이다. 당연히 그의 책은 당대의 최고 베스트셀러였다. 관원들이 모두 수집해 불태워 없앨 정도로 단속이 심했으나 그의 서적은 사대부들이 몰래 집안에 숨겨 놓고 보는 최고의 아이템이었다.

그의 출생과 관련해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그의 할머니 이야기다. 탁오의 원래 성은 임(林)이지만 나중에 개성(改姓)했다. 조부의 처, 즉 그 할머니는 아라비아 사람이라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저 설(說)에 그치는 정도가 아니라, 고증을 통해 밝혀진 얘기다. 따라서 그의 조부(祖父)로부터 그에게 전해진 혈통의 절반은 ‘외제(外製)’라는 이야기다.

중국 전반의 사정으로 볼 때 이 점이 특이하다고 할 수는 있겠으나, 전란과 재난을 피해 이동했던 인구가 늘 유입했던 푸젠의 특성으로 보자면 그리 특이한 사항도 아니다. 푸젠은 그렇게 많은 사람이 섞이며 피와 살을 나누고, 제가 지닌 문화의 숨결을 남의 것과 혼융(混融)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이탁오의 혈통이 ‘아라비안나이트 식’의 꿈과 낭만을 상당 부분 이어 받았다고 해서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셈이다.

그만이 그렇지는 않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푸젠은 이민사회의 활력이 꽤 넘치는 곳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탁오가 푸젠이 낳은 중국 전통 사상계의 큰 이단아라고 한다면, 문학에서는 유영(柳永)이 그에 화답한다. 유영이라는 인물은 이탁오보다 앞선 시대의 사람이다. 송(宋)나라가 낳은 가장 뛰어난 대중가요의 작사자라고나 할까.

그는 사대부였으면서도 사대부 같지 않았고, 전통 시인이면서도 점잔만 빼는 시인이지 않았다. 술집의 기생들은 그의 작품을 달달 외웠고, 여염집의 규수와 젊은이들 또한 그의 작품을 줄줄 뀄다. 그 또한 늦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해 벼슬자리를 차지했음에도, 곧 그에 싫증을 내며 기생이 영업을 하는 청루(靑樓)를 찾아다니는 일탈(逸脫)과 방랑의 실천자였다.

그의 전업은 관료, 그러나 부업은 작사자였다. 생활상의 주특기는 ‘기생집에서 뒹굴뒹굴’이었다. 그는 특히 기생이 있는 청루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그와 염문을 뿌린 기생 중에는 사옥영(謝玉英)이 있었다. 그의 작품을 흠모한 여인으로서, 몇 번의 만남과 헤어짐을 거쳐 둘은 부부처럼 살기도 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해 황제의 마지막 결제를 거쳐 진사(進士)에 오를 뻔한 적이 있다. 황제의 최종 검증 과정에서 당시 유행하던 사(詞)를 적어내는 과정이 있었는데, 그는 “뜬구름 같은 이름 좇느니, 차라리 술이나 마시고 노래나 하자(忍把浮名, 換了淺斟低唱)”고 적었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그만 잘렸다고 한다.

 


가장 대중적인 작품으로 민간의 절대적 인기를 얻었던 유영.


송나라 때 유행했던 사는 당나라 때의 시에 견줄 만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 중국 문학의 시가사(詩歌史)에 있어서 송사(宋詞)는 당시(唐詩)와 맞먹는다는 얘기다. 그 송사의 주옥같은 작품들 속에서 유영의 사는 단연 돋보인다. 시정(市井)의 생생한 감성을 작품에 녹여낸 점에서 그는 엄숙한 철리(哲理) 등을 노래한 다른 문인들과 커다란 차별을 보이고 있다.

당시 유행하던 사패(詞牌 작사를 필요로 하는 곡조) ‘우림령(雨霖鈴)’에 그가 붙인 사의 한 대목은 이렇게 펼쳐진다. “다정한 사람은 예부터 이별을 슬퍼한다고 했으니, 어떻게 견딜까, 싸늘한 가을의 계절을…오늘 새벽에는 어디서 술이 깰까? 버드나무 서있는 강가, 아니면 새벽바람 속 이지러진 달?(多情自古傷離別, 更那堪, 冷落淸秋節”. 今宵酒醒何處? 楊柳岸, 曉風殘月)”

2013-07-19 11:1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