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화 도연명의 시심이 무르익었던 곳 - 장시(1)

“옆으로 보면 산맥이요, 아래위로 보니 봉우리로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시(詩) 한 수가 있다. 제목을 말하기 전에 그 다음 구절을 먼저 따라가 보자.

“멀고 가까움에 높고 낮음 모두 다르구나.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없으니, 몸이 이 큰 산 안에 갇혀 있음이라.”

시의 원문을 아래에 옮긴다.  

橫看成嶺側成峯,
遠近高低各不同.
不識山真面目,
祇緣身在此山中

 


장시의 여산이다. 역대 문인들이 많이 찾아 시문을 남긴 곳. 공산당의 당 대회 등으로도 유명하다.

 

북송의 최고 문장가 소동파(蘇東坡)가 지은 시다. 장시(江西)의 명산인 여산(廬山)을 찾았을 때 지은 작품이다. 이 시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유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진면목(眞面目)’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옆으로 보면 줄줄 이어지는 산의 행렬, 아래위로 보면 우뚝하고 험준한 봉우리. 멀리서 보니 겹겹이 늘어선 산들이요, 아래위로 보니 그 높고 낮음이 제각각이라 아득한 느낌만 준다. ‘도대체 이 산이 어떤 모습인지 알 수가 없겠다’라는 망연함 속에서 우러나오는 생각, 결국 큰 산 안에 좁쌀보다 더 조그맣게 들어앉은 내 처지에서는 여산의 진짜 모습을 알 수가 없겠다는 푸념이다.

드넓어 가없는 대자연 속, 사람이라는 존재의 보잘것없음을 일깨워주는 명시(名詩)다. 앎이란 다 그런 것일지 모른다. 전체를 보기 전에는 존재의 진면목을 알 수 없는 법, 제 깜냥이 뛰어나다고 우쭐거리는 사람에게 ‘한 방’ 날리는 소동파의 경고일지 모른다.

소동파의 시에 등장하는 이 여산, 그리고 마오쩌둥(毛澤東) 시절의 중국 공산당이 중요한 회의를 거듭 열면서 우리에게 친숙해진 여산, 그에 앞서 중국을 통치한 장제스(蔣介石)의 여름 별장이 있어 유명해진 여산을 품고 있는 곳이 바로 장시다.

 


공산당의 여산회의는 많은 일화를 남겼다. 
6.25전쟁 때 중공군 총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는 여산에서 열린 회의에서 마오쩌둥의 공격을 받아 낙마한다. 
회의에 참석한 마오(오른쪽)과 젊은 시절의 후야오방 전 총서기(왼쪽).

 

그 다양하고 신비로운 모양새 때문에 소동파로 하여금 ‘그 진면목을 알 수가 없겠다’는 푸념을 내뱉게 했던 여산은 어쩌면 이 장에서 소개하는 장시의 이미지를 그대로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지리와 인문의 측면에서 장시는 매우 다양한 갈래를 지닌다. 특징이 많다는 얘긴데, ‘특징이 많다’는 것은 어쩌면 ‘특징이 없다’라는 말과 통하는 셈이니, 장시의 경우가 꼭 그렇다. 그래서 “장시의 진면목?”이라고 묻는다면 돌아오는 대답은 대개가 “글쎄…”다. 그렇다고 어찌 그렇게만 대답하고 어물거리며 넘어갈 일일까.

 


궁벽하지만 평안했던 땅


길이 6300㎞의 장강(長江) 동부 이남 지역을 중국에서는 보통 강남(江南)이라고 부른다. 장쑤(江蘇)와 저장(浙江), 후베이(湖北)과 후난(湖南) 등이 그에 해당한다. 장시 또한 강남의 한 자락을 차지하는데, 강남의 서쪽 길(西路)에 있다고 해서 당나라 때 붙여진 이름이 장시다.

흔히 장시의 지리를 표현할 때 ‘7할이 산지요, 2할이 하천이며, 1할이 논밭(七山二水一分田)’이라고 적는다. 저장과 인근의 강남 지역도 그런 사정은 매 한가지다. 그렇지만 장시는 그런 강남 지역에서도 묘한 경계성을 지닌다. 위도 상으로는 저장성의 서남쪽에 있으며, 앞 회에서 소개한 화교들의 본향(本鄕)이라고 할 수 있는 푸젠(福建)과는 비슷하다.

푸젠이 북쪽의 강남지역과는 우이(武夷)라는 커다란 산맥에 의해 크게 갈라지는 데 비해 장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르다. 장시는 오히려 북쪽의 강남지역과는 커다란 평원으로 이어져 있다. 따라서 푸젠은 강남의 문화가 산맥에 막혀 주춤거렸던 데 비해 장시는 그런 강남의 문화가 깊숙이 들어와 이곳에 발달한 산지와 구릉 속에 골골이 박히면서 알차게 영글었다는 차이를 지닌다.

 


장시의 또 다른 상징인 파양호의 일몰이다. 중국 최대 담수호라고 한다. 


북녘의 강남문화와 접경을 이루는 장시의 북부지역은 여러 갈래의 하천과 함께 중국 최대 담수호(淡水湖)인 파양호(鄱陽湖) 등이 발달해 있다. 한반도 면적에 비해 조금 작은 16만6900㎢이지만, 그 가운데로 흐르는 하천은 2400여 개에 달한다. 장시 중부 이남은 그에 비해 깊은 산지와 구릉이 발달해 있다.

앞에서도 여러 번 소개했지만, 중국은 늘 벌어지는 북쪽의 전란으로 인해 인구의 이동이 다반사처럼 벌어졌던 역사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장시 또한 끊임없이 북에서 남으로, 살기 어려운 곳에서 좀 더 살기 평안했던 곳으로, ‘칼과 창이 늘 번득였던(刀光劍影) 곳’에서 ‘내 끼인 달빛이 은은하게 내리는(康衢煙月) 곳’으로 움직였던 인구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장시에 앞서 소개한 다른 강남지역, 저장과 푸젠 및 후베이 등이 다 그런 경우다. 원래의 거주민이 일군 텃밭에 저 먼 북쪽의 유목민족 침략에 밀려 남부여대(男負女戴)의 형상으로 쫓겨 내려온 수많은 이주민들이 결합해 강남의 여러 문화를 만들어낸 인문적 배경은 같다는 얘기다.

그러나 장시 북쪽의 강남 문화는 전통 왕조의 수도가 있던 베이징과 장안, 낙양 등과는 거리가 가깝다. 그로부터 원거리에 있는 문화일수록 왕조가 주도하는 질서로부터 다소 자유롭다는 특징이 있다. 장시가 그런 경우다. 같은 강남지역의 문화권이라고 하더라도 장강 바로 아래에 있는 다른 강남에 비해 그 거리가 더 떨어져 있는 장시의 문화는 맥락은 같을지 모르지만 한결 자유로운 감성과 사색의 경향을 띤다. 게다가 수많은 산지와 구릉, 그리고 다양한 하천이 발달해 있어 분위기는 한결 더 고립적이다.

중국 전통 시단(詩壇)에서 문명(文名)을 크게 떨친 이가 어디 한둘일까.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만큼 그 수는 많다. 그러나 빛의 세기가 아주 강렬한 시인을 꼽으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런 휘황찬란한 광채를 내뿜는 시인이 있으니, 그 이름은 바로 도연명(陶淵明)이다.

도연명의 작품 ‘도화원기’를 바탕으로 그린 도화원의 상상도. 중국인들이 꿈의 이상향으로 여기는 곳이다. 도연명의 작품은 그렇게 후대의 중국인 문학 정서에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우리에게 ‘귀거래사(歸去來辭)’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조그만 관직을 차지했으나, 그에 맞지 않는 성정(性情)을 제가 살던 고향으로 돌아감으로써 회복코자 했던 전원파(田園派) 시인의 으뜸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세속을 멀리하고 자연 속의 안온함 찾기에 골몰했던 그의 시적인 취향은 후대 중국 문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세속의 잡스러움을 멀리하면서 깨끗한 마음을 유지하려 했던 수많은 후대 시인들에게 그의 작품은 하나의 전형(典型)이자 상징(象徵)이었다. 숨을 조일 듯한 왕조의 질서를 벗어나 심신을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맡겨 평담(平淡)하지만 진솔한 문학의 세계를 열었던 인물이다. 그로 인해 도연명 이후의 수많은 후대 문인들은 인간 본연의 맛과 멋을 찾아 문학적 상상력의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나중의 중국 문인들은 도연명을 ‘은일함의 큰 스승(千古隱逸之宗)’이라고 일컫는다.

 


술을 즐겼던, 그리고 세속을 멀리하는 청류(淸流)와 전원(田園)의 시풍으로 유명했던 도연명.


그가 중국 전통 문단에서 이름을 크게 얻은 작품은 ‘귀거래사’ 외에도 많다. 우리가 흔히 이상향(理想鄕)을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도화원(桃花源)’이다. 이 단어의 유래도 도연명이 쓴 ‘도화원기(桃花源記)’다. 세상이 주는 번잡함과 속물스러움을 벗어나 긴 동굴을 거쳐야 도달하는 천국과 같은 낙원, 그런 이상적인 세상을 도연명은 ‘도화원기’라는 작품 속에서 아스라이 펼쳐 보였다. 

그는 술을 좋아했고,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를 캐다가, 문득 시선을 드니 눈길이 가서 닿는 먼 산(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이라는 마음의 경계에서 평온함을 찾았다. 그는 결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일정한 질서 속에서의 삶을 거부했다. 그래서 ‘다섯 말 쌀(당시의 일반 관리 급여)에 허리를 굽히지는 않는다(不爲五斗米折腰)’는 성품을 쌓았다.

‘음주(飮酒)’라는 시편을 남길 정도로 그는 자연에 취할 만큼, 술에도 취했다. 벼슬자리에도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아 생활은 늘 곤궁했으나 그 마음만큼은 늘 평온함을 유지했다. 가난함 속에서도 마음으로 찾는 안온함이었다. 그 점에서 보면 그는 우리가 이 장에서 이해해야 할 장시 문화의 뚜렷한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제가 지닌 중심을 잃지 않으며 꿋꿋하게 제 소질을 갈고 닦아 실력을 발휘하는 그런 사람들이 사는 곳이 장시라는 말이다.

 

주희의 관념적 철학도 장시가 낳은 자랑

 

장시를 흔히 ‘오두초미(吳頭楚尾)’라고 부르기도 한다. 옛 춘추전국 시대를 기준으로 볼 때 장시의 북부가 오(吳)나라 및 초(楚)나라의 문화가 서로 섞였던 지역이라는 뜻이다. 오와 초라고 하는 옛 춘추전국 시대 두 강국은 중국 문화권역을 따질 때 매우 중요하다. 둘 모두 중국 장강 이남의 이른바 ‘강남 문화’를 대표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이 ‘강남’이 의미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다. 앞에서 소개했듯, 전통적으로 중국 문명을 이끌었던 중원의 문화와는 여러 모로 커다란 차이를 드러내며 그와 함께 쌍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문화의 바탕은 후베이를 소개하는 편에서도 소개했듯이 상상력과 낭만, 현실보다는 이상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에게 주자(朱子)라는 명칭으로 더 잘 알려진 주희. 
조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성리학의 집대성자다. 
출생지는 푸젠이지만 조상 대대로 거주했던 곳이 장시다.


북방인 중원의 문화가 『시경(詩經)』처럼 실질적이며 현실적인 흐름을 보이는 것과 달리, 『초사(楚辭)』가 대변하는 강남의 문화는 이상과 낭만, 그리고 몽환(夢幻)의 정신세계를 그려낸다. 따라서 장시를 ‘오나라와 초나라의 문화가 어울린 곳’으로 적는다는 것은 이 지역이 강남의 핵심 문화 콘텐트를 제대로 유지하며 간직한 채 발전했다는 얘기와 같다.

철학적 사유에서도 그런 강남의 문화적 전통을 이어 중국 사상사에서 커다랗고 굵직한 획을 그은 이가 있으니, 그 이름이 바로 주희(朱熹)다. 그가 남긴 중국 유학사(儒學史)에서의 족적이 너무나 커, 공자(孔子) 등 성현에만 붙이는 ‘자(子)’라는 호칭을 붙여 주자(朱子)라고도 적는 사람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엄밀히 따지자면 장시가 아니다. 전 편에서 소개한 푸젠이 그의 출생지다. 그러나 고향으로 말한다면 그는 장시 사람이다. 조상이 대대로 거주했던 바탕이 장시 동북부의 우위안(婺源)이다. 그 지역 전통이 강남문화를 대변했던 옛 오나라와 초나라의 문화가 섞였던 곳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고향의 정서를 간직하고 생활했던 주희에게도 무엇인가 남다른 ‘강남 스타일’이 전해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품어볼 수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유학에 관념적 철학 사유를 덧붙인 이학(理學)을 집대성한다. 왕조적 질서에만 국한했던 유학의 상상력 범주를 우주와 만물의 경계에까지 넓혀 이기론(理氣論)을 펼치며 그 전까지의 유학을 아주 높은 수준에까지 밀고 올라간다. 관념적 바탕이라는 새로운 경계에 들어선 중국의 유학은 그 공적을 이룬 주희에 의해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중국의 ‘강남 스타일’ 속에서 자라난 주희의 상상력이 유학을 찬란할 정도로 발전시켰으나, 그 결말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그의 관념적 상상력으로 중국의 전통 유학은 더욱 힘을 받았고, 주희가 더 굳힌 삼강오륜(三綱五倫)의 관념적 질서는 그 영향 아래 있었던 수많은 중국인과 주변 동아시아 사람들의 사고와 삶을 더욱 옥죄었기 때문이다.

은일함 속에서 일탈을 꿈꿨던 중국 문단의 별 도연명과 관념적 토대를 발전시켜 중국 유학 사상을 크게 발전시킨 주희는 어찌 보면 어울릴 듯하고, 다른 시각에서 보면 전혀 어울릴 듯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이 장시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마치 북송의 문인 소동파가 장시의 최고 명산(名山)인 여산을 보면서 “그 진면목을 도대체 알 수 없으니…”라며 푸념을 늘어놓는 심경과 같다고 하면 같은 셈이다.

2013-08-02 16:1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