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화 도연명의 시심이 무르익었던 곳 - 장시(2)

장시가 배출한 정치인

장시가 낳은 가장 유명한 정치인은 왕안석(王安石)이다. 북송(北宋)의 정치개혁을 주도했던 인물로, 신당(新黨)이라는 정치적 세력을 모아 북송 왕조가 쌓은 적폐(積弊)를 일소하는 데 주저 없이 나선 사람이다. 그의 개혁 의지는 아주 날카롭고 강했으며 아주 과감했다.



강력한 개혁으로 중국 역사에서 이름을 떨친 북송의 왕안석.


그의 소신은 “하늘이 변하는 것도 두렵지 않고, 조상이 남긴 유산도 본받을 필요가 없으며, 사람의 말에 흔들릴 것도 없다(天變不足畏, 祖宗不足法, 人言不足恤)”는 식이었다. ‘이것저것 다 따지다보면 개혁은 물 건너간다’는 얘기였다. 따라서 그가 내세운 개혁의 칼은 거칠 게 없었다. 대지를 휩쓰는 폭풍우처럼 그의 개혁 방안은 북송을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중국 정치사에서 왕안석이라는 인물이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드높다. 전체 중국 정치사에서 ‘개혁’이라는 두 글자를 언급할 때 그를 그냥 둔 채 넘어갈 수 없을 정도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중국 2500여 년의 정치 사상사에서 ‘개혁’이라는 화두를 내걸고 가장 치열하게 움직였던 인물이다.

그의 일화를 전하는 각종 기록에 따르면, 왕안석은 정상적인 정치인이라기보다는 기인(奇人)에 가깝다. 우선 그는 잘 씻지 않았다. 머리를 잘 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세수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옷은 더구나 잘 갈아 입지 않았다. 늘 때가 잔뜩 끼어있는 옷소매로 주변 사람들의 냉소를 자아냈었고, 위생관념이 전혀 없는 행동으로 남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는 저 유명한 ‘판관 포청천(包靑天)’과 동시대 인물이다. 포청천이 21세 연상으로 북송 왕조의 선배이자 상관이었다. 목단(牧丹)이 피어난 어느 날 포청천이 파티를 열었다. 조정의 여러 대신들이 모두 참석했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받는 두 사람이 왕안석과 사마광(司馬光)이었다. 둘은 정치적으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던 라이벌이었다.

사마광은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은 유명 역사가이자 왕안석이 추진하던 개혁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인물이었다. 조정의 대선배인 포청천은 그 둘에게 술을 권했다. 왕안석은 “저는 평생 술을 마시지 않기로 했다”며 계속 거절했고, 사마광 역시 술잔을 잡지 않았다. 그럼에도 포청천은 계속 술을 권했다. 마지못해 사마광은 술잔을 들었으나, 왕안석은 끝내 꿈쩍도 하지 않았다.

 


포청천(왼쪽)과 사마광.


행동거지나 차림새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왕안석, 그리고 주변에서 사람이 죽어 넘어져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개혁안을 밀어붙이는 냉정한 왕안석이었다. 그래서 사마광과 소동파 등 정적을 무수히 남겨 이름값을 더했던 왕안석이었다. 그런 왕안석의 성격을 엿보게 해주는 일화가 바로 위의 내용이다.

그로부터 멀지 않은 한 인물이 있다. 바로 구양수(歐陽修)다. 그 또한 장시가 낳은 불세출의 정치가이자 문인이다. 흔히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라고 하는 문인 그룹이 있다. 후세가 붙인 이름이기는 하지만, 중국 문단에서 산문(散文)의 명품이 즐비하게 나왔던 당송시대, 그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문장가 여덟 명을 이르는 칭호다.

사람들은 이 여덟 문장가 중에서도 네 명을 다시 골라낸다.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 그리고 구양수와 소동파다. 이들을 ‘산문 사대가’라고 부르는데, 그 정도로 구양수는 문장과 시가 빼어났던 것으로 유명하다. “술 취한 늙은이의 뜻이 술에 있겠는가(醉翁之意不在酒)”라는 말은 요즘 중국인들도 즐겨 쓰는 명구인데, 그 문장이 들어 있는 ‘취옹정기(醉翁亭記)’가 특히 유명하다. 아울러 가을이 다가오는 밤의 뜰에 나가 그 정취를 소리로 묘사한 ‘추성부(秋聲賦)’는 천고의 명문으로 전해온다.

 


산문의 대가이자 왕안석의 북송 선배 관료였던 구양수. 


그 구양수 또한 정치적 지향이 매우 개혁적이었다. 그러나 방법의 면에서는 왕안석과 달랐다. 그는 왕안석보다 21세 많은 고향의 대선배이자, 조정의 상관이었다. 그 역시 정치의 폐단을 없애고자 부단히 노력했으나, 왕안석이 주도권을 잡은 개혁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방법적인 측면에서 더 극단적이었던 왕안석과 호흡을 같이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호불호가 분명했으며, 성격은 굳고(剛) 매서웠다(烈)는 평을 들었다. 왕안석이 추진한 변법(變法) 개혁에 밀려 지방관으로 쫓겨 내려갔을 때에는 현지에서 재상인 왕안석의 개혁안을 아예 깡그리 무시한 채 시행하지 않아 노여움을 크게 사고 말았다는 일화도 남겼다.

그럼에도 그는 북송 문단의 우두머리였다. 고향의 새카만 후배였던 왕안석을 조정에 추천했으며, 소동파를 비롯해 소순(蘇洵)과 소철(蘇轍) 등 소씨(蘇氏) 세 부자, 사마광 등 유명 정치인의 후견인이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추천하고 챙겼던 많은 문인 관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문단의 맹주(盟主)로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왕안석과 구양수의 예에서 보듯이, 장시 출신의 정치가들은 자신의 의지와 이상을 잘 굽히지 않는 성향을 보인다. 성격이 굳고 매서워 자신이 품은 뜻을 끝까지 펼치려 하는 성격이 강해 보인다. 

2013-08-02 16:18: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