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화 동이(東夷)의 맥박이 느껴지는 곳- 산둥(1)

중국의 문명적 요소는 아주 다양한 갈래를 보인다. 흔히 중국을 ‘황하(黃河) 문명’이라고 하는데, 이는 일종의 ‘무단(武斷)’이다. 이 무단이 무엇인가. 조심스럽고, 차분하며, 이지적으로사물이나 현상 등을 바라보지 않는 자세다. 칼로 무 베어내듯, 일도양단(一刀兩斷)으로 앞뒤 위아래를 뚝 잘라내고 한 면만을 강조하거나 내세우는 일이다.

‘중국’이라는 곳에 숨어 있는 다양한 갈래를 단칼에 자른 뒤 그 중의 일부분인 ‘황하’만을 내세워 “중국은 황하문명의 소산”이라고 한다면, 이는 정말 터무니없는 재단(裁斷)에 해당한다. 끊을 때 끊더라도, 전후좌우(前後左右)의 맥락을 잘 살펴야 한다.

중국은 보는 이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대개 몇 개의 요소들이 모여 만들어진 문명체다. 우선 많은 이들이 주장하는 황하의 요소가 있고, 이 시리즈의 1회에서 소개했듯 삼성퇴(三星堆)의 발굴 결과가 말해주는 서남(西南), 장강(長江) 이남의 강남권에 속하는 초(楚), 동남부 연안에 발달한 오월(吳越) 등이 있다.

장강 이남이나 중부 지역의 그런 다양성에 비해 북방은 다소 갈래가 단순하다. 그 중에서 황하의 문명적 요소는 서북부에 편중해 있고, 동쪽에는 이른바 ‘동이(東夷)’라고 하는 또 다른 요소가 존재했다. 우리가 이 번 회에서 탐구할 대상은 바로 이 동이다. 그리고 동이의 문명적 요소를 잘 간직해 이를 중국이라는 시공(時空)의 무대에 화려하게 펼친 곳이 바로 산둥(山東)이다.


내몽골과 랴오닝 접점에 존재했던 옛 홍산 문화의 대표적 유물, 여신상(왼쪽)과 옥으로 만든 곡룡(曲龍 오른쪽)이다.
학계는 동북, 즉 만주 일대의 문명적 토대를 이룬 게 홍산 유적이라고 한다.
동이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으며, 한반도의 뿌리인 고조선과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천재가 즐비하다

이 산둥은 어쩐지 우리와 매우 친숙하다. 6공 정부의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은 중국에서 매우 좋은 대접을 받는 한국 정치인이다.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할 당시 한국은 중국과 수교했다. 한반도 분단의 비극적 상황을 딛고 냉전의 대립적 구도를 넘어서 ‘죽의 장막’을 헤치고 나온 중국과 국교를 텄으니, 친구 사이의 의리를 잘 따지는 중국의 입장에서 노 전 대통령은 ‘정말 좋은 친구’, 즉 ‘라오펑여우(老朋友)’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퇴임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면 현직의 국가원수 못지않은 대접을 받는다. 그런 중국의 극진한 대접에 마음 줄을 잘못 놓은 것일까. 노태우 전 대통령은 퇴임 직후에 중국을 방문했을 때, 한 가지 중대한 ‘실수’를 하고 만다.

그가 수행원들과 함께 산둥을 방문했을 때 벌어진 일이다. 노 전 대통령은 현지의 중국인들이 듣는 앞에서 “여기가 바로 우리 할아버지의 고향”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노씨(盧氏)’는 ‘강씨(姜氏)’에서 떨어져나간 갈래로 여겨진다. 그러니까 두 성씨의 뿌리는 같다는 얘기다. 중국의 강씨 중 ‘강태공(姜太公)’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강상(姜尙)은 그 뿌리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그런 점을 언급한 것이다.

중국과는 엄연히 다른 국체를 형성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직 국가원수가 중국 땅에 발을 딛고서 “내 뿌리가 여기 있다”라고 하니, 동아시아의 정치·문화적 맹주(盟主)임을 내세우고 자처하는 중국인들이 얼마나 기뻤겠는가.


공자의 초상. 그는 주지하다시피 중국 문명의 근간을 이룬 유학의 창시자다.

그 시비는 자세히 논하지 않겠다. 단지 우리가 한자(漢字)를 차용하고, 나중에는 성씨까지 차용했다는 점만은 기억하자. 진짜 그곳으로부터 한반도로 이주한 사람들의 후예도 있겠으나, 한반도를 구성하는 주민들 중 혈연이 직접 중국과 닿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더라도 산둥은 어딘가 우리에게 익숙하다. 한반도의 태안반도와 중국의 산둥 반도는 지리적으로 매우 가깝다. 오죽하면 서산이나 당진에서 건너편 산둥의 닭 울음 소리가 들린다고 허풍까지 놨을까. 지리적으로 근접하면 사람의 발길도 잦아진다. 산둥은 한반도와의 인접성 때문에 고래로 한반도 사람들의 발길이 부지런히 이어진 곳이기도 하다.

또 다른 의미에서 산둥이 어딘가 모르게 한반도 사람들에게 친숙해 보이는 요소가 있다. 바로 ‘동이(東夷)’ 때문이다. 한반도의 혈계(血系)를 문명적 요소로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분류 개념의 하나다. 동북아시아의 원래 민족 구성을 설명할 때 이 동이는 반드시 등장한다. 중국 화북(華北)과 동북(東北), 나아가 한반도를 구성하는 주민들의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는 설이 있다.

중국의 문명적 여러 요소를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이 동이의 문화는 매우 중요한 위상을 지닌다. 중국 문명의 새벽에 활동했던 여러 세력 중 이 동이족의 활동과 기여는 중국이라는 문명체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5000~7000년 전인 신석기(新石器) 말의 여러 흔적들은 그 이후 등장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현재 중국의 직접적인 뿌리다. 그 신석기 시절에 산둥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남긴 흔적은 ‘대신(大辛) 문화’ ‘대문구(大汶口) 문화’ 등의 고고학적 발굴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상태다.

그러나 너무 먼 이야기다. 그보다는 시기를 조금 더 우리 쪽으로 당겨서 이야기를 이어가자. 결론적으로, 중국 문명사 속에서 산둥이 뿜어낸 빛줄기는 휘황찬란하다. 우선 중국 문명의 여명기라고 할 수 있는 춘추(春秋 BC770~BC476년)시대의 개념으로 볼 때 이 산둥은 동이의 문화적 토양으로부터 성숙한 나라 제(齊)와 노(魯)나라가 있던 곳이다. 이 점 때문에 산둥의 문화권을 이야기할 때 현대의 중국인들은 이를 ‘제로(齊魯)문화’라고 호칭한다.

이 제로문화의 특징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중국의 문화적 맥락은 상당한 부분이 바로 이곳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우선 꼽아볼까. 먼저 공자(孔子)다. 이 사람이 어떤 인물인가를 다시 늘어놓는다면 독자들은 금세 식상해할 것이다. 그 계통을 이어 중국 사상사에서 큰 점을 찍었던 맹자(孟子)도 있다. 그 맹자에 앞서 공자의 후손으로 유학적인 사고를 궤도에 올린 증자(曾子)도 빼놓을 수 없다.

산둥은 그럼 유학만을 키웠을까. 아니다. 사람 사이의 싸움과 경쟁의 긴장관계를 치밀하게 관찰해 병법(兵法)과 병략(兵略), 나아가 전략(戰略)을 체계화한 희대의 군사사상가(軍事思想家) 손자(孫子)도 이곳 사람이다.

이처럼 호칭에 ‘자(子)’를 붙이는 경우에 주목하자. 이런 호칭은 아무에게나 주는 게 아니다. 어느 한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루는 것은 아주 최소한의 ‘기본’이다. 그 일가를 이룬 데 이어 사방팔방으로 그 영향력을 뻗쳐야 함은 물론이고, 시대를 초월해서 영원토록 다른 사람들이 그 업적을 인정해야 붙는 호칭이다.

공자는 중국을 대표하는 가장 상징적인 사상체계, 즉 유교 철학의 창시자다. 맹자 또한 그 법맥(法脈)을 이어받아 유교를 키웠다. 증자는 그 중간에서 유학적 사고를 제대로 자리 잡도록 이끈 인물이다. 손자는 또 어떤가. 그는 중국 병법을 최초로 체계화한 인물로 꼽힌다. 아울러 중국의 병법 사상은 그로써 완결하는 단계에까지 이른다.


산둥 출신이 낳은 중국 희대의 군사 천재 손자. 산둥에 있는 그의 고향에 세워진 석상이다.

모두 ‘희대의 천재’에 해당한다. 그런 사람에게나 겨우 붙일 수 있는 호칭이 바로 그 ‘자’다. 산둥의 제로문화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자급(子級)’ 천재는 바로 묵자(墨子)다. 유학의 법통에 섰던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지만, 그 역시 박애(博愛)의 개념인 ‘겸애(兼愛)’의 논리를 펼치면서 중국 사상사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인물이다.

비록 그 ‘자급’의 천재는 아닐지라도,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제갈공명(諸葛孔明 제갈량)도 산둥이 낳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손자(본명 孫武)의 ‘진짜 손자(孫子)’인 손빈(孫臏)도 할아버지 못지않은 병법을 선보인 천재로, 당연하게도 역시 산둥 출신이다. 강태공 역시 뛰어난 정치사상가로 활동하며 산둥에 빛을 더했던 인물이다.


지략의 화신으로 추앙받는 제갈량 또한 산둥이 낳은 걸출한 인물이다.

이렇게 산둥은 천재의 고향이다. 천재는 머리만 뛰어난 사람이 아니다. 하늘이 그에게 무엇인가를 주었다고 보일 만큼 시대를 초월한 예지력에 사물과 현상의 전후좌우를 꿰뚫을 수 있는 통찰력을 갖췄으며, 자신의 사고가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게끔 완결성을 이룬 초인적인 의지력의 소유자다.

2013-08-20 10:5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