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화 동이(東夷)의 맥박이 느껴지는 곳- 산둥(2)

공자 20대 손 공융(孔融)이라는 인물로 본 산둥 사람

춘추시대의 개념으로 따지자면 산둥이 ‘제로 문화’의 권역에 있다는 점은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다. 이 제로는 중국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특별하다. 관중(管仲)을 부하로 거느리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꿈을 실현해 춘추시대의 가장 큰 패업을 달성한 제나라 환공(桓公)은 지금까지 강대한 국가의 건설을 꿈꾸는 중국 정치인들의 표상이기도 하다.



산둥 칭다오(靑島)의 전경. 옛 제나라의 기운을 이어받은 땅이다.
노나라는 산둥 성도회지가 있는 지난(濟南)을 근거지로 했다.


그런 제나라의 전통과는 달리 노나라는 몰락한 천자(天子)의 주(周)나라 전통을 이어받아 사상적 기반을 닦은 나라다. 춘추라는 시공 속 구심점을 이뤘던 주나라의 예악(禮樂)이라는 전통을 이어받아 이를 더욱 발전시킨, 단단한 철학적 기반과 문화적 풍토를 지닌 나라였다.

제나라는 강하고 실력 있는 나라 건설과 그 경영의 표본을 제시했고, 노나라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점잖게, 멋지게 살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해 결국 중국 사상사에서 가장 중요한 흐름인 유학의 전통을 빚어낸 곳이다.

따라서 산둥은 지역적으로 광대하거나, 물산이 특히 풍부하다는 특징을 갖추지 못했으면서도 중국 정치, 경제, 문화적 맥락 속에서는 매우 독특하며 대단한 매력을 뿜는다. 이런 점이 동이의 특징이라고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어쨌거나 서북의 황하 문화권 속에서 자란 사람들과는 기질적으로 다르다는 느낌을 준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런 산둥 사람들은 어떤 기질의 소유자일까. 물론 한반도 전체 인구에 맞먹는 그 많은 산

산둥을 대표하는 도시 중의 하나인 칭다오. 옛 제나라가 꿈을 키웠던 곳이다. 칭다오에는 한국 기업들이 꽤 많이 진출해 있다.

산둥 사람들의 기질을 몇 가지로 정의하는 일은 어렵고, 또는 불가능하며, 때로는 무모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중국에서 통용되는 나름대로의 정평(定評)은 있다. 우선 강직(剛直)하고 매서우며, 싸움에 나설 때 물러서지 않으며, 많이 먹고 많이 마신다 등이다.

‘산둥의 멋진 사내’라는 중국식 표현이 있다. 중국어로 적으면 ‘山東好漢’이다. 사람 사이의 의리를 중시하며, 불의(不義)를 보면 참지 못하며, 누르면 일어서고, 한 대 맞으면 두 대로 갚는 그런 성격을 지닌 사람이다. 대개 기질이 강해서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면 참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호방한 기질로 약한 사람을 돕는 의협(義俠)의 행위를 보이는 사람도 이에 속한다. 그래서 산둥 사람에 대한 중국 내의 전체적인 평가는 아주 좋은 편이다.

물론 실제와는 차이가 있지만, 그런 멋진 사내들이 모여 로망을 펼쳤던 이야기를 담은 책이 있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수호전(水滸傳)』이다. 108명의 두령이 양산박(梁山泊)이라는 곳에 모여 의적(義賊)으로서 활동했다는 이야기가 큰 줄거리다. 그 배경이 바로 산둥이다. 이점 때문에 ‘산둥-수호전의 양산박-좋은 사내’라는 이미지가 박혔는지 모르겠다.



중국 4대 기서 중 하나 『수호전』에 등장하는 108명 두목의 그림이다.
이들이 거처로 삼았던 양산박은 산둥의 한 지역이다. 산둥의 지역적 분위기를 잘 표현한 작품이다.


그런 산둥의 기질을 잘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공융(孔融)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우리에게 다소 낯설지는 몰라도 중국인들에게는 매우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삼국지(三國志)』속의 조조(曹操)와 동시대 사람으로, 조조와는 매우 깊은 악연(惡緣)으로 맺어진 사이다.

그는 또한 공자의 20대 후손이다. 역시 태어난 곳은 산둥이다. 먼 할아버지인 공자의 핏줄을 이었음은 물론이고, 공자가 활동했던 노나라의 예악적인 전통도 간직했던 인물이다. 그의 성격은 중국 식 표현을 따르자면 ‘작은 것에 구애를 받지 않으며(不拘小節), 자신의 재능을 믿어 자신감을 보이며(恃才負氣), 강직한 성격으로 아부하지 않는다(剛正不阿)’다.

그에게 따르는 일화는 꽤 많다. 먼저 어릴 적 이야기다. 열 살 소년이었던 공융이 당대의 이름난 명사를 찾아간 일이 있다. 이응(李膺)이라는 이 유명한 고관 집에 도착한 공융은 다짜고짜 “이응 선생의 친척이 찾아왔다고 알려라”고 한다. 그러나 공융을 문에 들인 이응은 “네가 왜 내 친척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공융은 “선생의 먼 조상인 노자(老子)와 제 조상인 공자가 서로 스승과 제자로써 맺어졌으니, 당신과 나는 조상 대대로 친분을 맺은 사이 아니겠느냐”고 대답한다. 열 살짜리 소년의 배포와 기지(機智)가 대단해 보이는 대목이다.

어이가 없었겠으나 참을 수밖에 없었던 이응은 그 때 찾아온 한 손님에게 공융의 이런 면모를 전했다. 역시 당대의 이름난 사대부였던 이 손님은 픽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릴 때 똑똑한 사람이 커서는 꼭 잘 되지 않는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공융이 “아, 그러니 선생께서는 어렸을 때 매우 똑똑했겠군요”라고 되받는다. 보통의 재치가 아니다. 그러나 입이 너무 빠른 게 단점일까.


공융의 초상이다.


당시의 조조는 한(漢)나라 헌제(獻帝)의 최고 권신(權臣)이었다. 세상의 사람들은 그런 조조를 두고 “곧 한나라 황실을 잡아 내리고 황제로 등극할 야심가”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조조는 실제 황실의 최고 신하 정도가 아니라 천하의 대권까지 넘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조정의 수많은 대신과 관료들은 그의 말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러나 공융만은 달랐다. 그는 조정의 회의에서나, 일반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나 그런 야심가이자 최고 권력에 한 발짝만 남겨두고 있던 조조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아는 체를 하면 그 지식의 천박함을 조롱하며 면박을 주기 일쑤였고, 무슨 결정이라도 내리기만 하면 조목조목 근거를 들이대며 반박을 해댔다.

조조는 이를 갈았다. ‘저 놈을 언젠가는 죽여야지…’라는 생각이 움트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공융의 비아냥과 날선 비판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공융에 손을 대기는 어려웠다. 그의 명성이 지극히 높았기 때문이었다. 공융은 당시 기울어가던 한나라 황실의 권력 강화를 위해 충성을 다했고, 그 점은 조정의 대신과 일반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다. 더구나 그는 그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중국 최고의 지성, 공자의 20대 후손 아니던가.

그러나 결국 조조의 분함은 극도에 달했고, 마침내 공융의 제거에까지 이르렀다. 한나라 황실의 보호를 위해 수도 1천리 안에 제후를 봉하지 말아야 한다는 공융의 건의는 결국 조조의 살기(殺氣)를 키웠다. 최고의 권력자로 떠오르던 조조의 세력은 시비만을 일삼는 공융을 제거함으로써 자신들이 품어왔던 천하 권력의 장악에 도달코자 했던 것이다. 결국 공융을 포함해 그 일족(一族) 모두가 처형대에 오른다.

그 때 남은 마지막 일화가 있다. 공융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일족이 모두 죽는 멸문(滅門)의 화를 피하도록 하기 위해 주변의 어떤 이가 아들들에게 “어서 도망치라”고 길을 터줬다. 그러나 그 아들이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새 둥지가 뒤집히는데 그 안에 있는 알이 온전하겠습니까”다. 한자로 적으면 “覆巢之下, 復有完卵乎”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어렸을 적 이응이라는 고관의 집을 찾아가 당돌하게 기지를 펼쳤던 공융이나, 일가 모든 친족이 죽는 마당에 저만 도망칠 수 없다는 그 아들이 꼭 같은 기질이다. 날이 시퍼런 조조의 권력에 조금도 굽히지 않으며 조롱과 비판을 주저하지 않는 공융의 면모가 생생하다.

2013-08-20 10:5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