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화 영남에 살아 숨 쉬는 혁명의 기질 - 광둥(1)

아열대이면서도 기후적 특성에 따라 중국의 북쪽과 남쪽은 중아열대(中亞熱帶)와 남아열대(南亞熱帶)로 다시 나뉜다. 중국에서 그 둘의 분계선에 해당하는 곳이 난링(南嶺)인데, 이곳은 동서(東西)로 뻗는 횡향(橫向) 구조의 산맥이다. 거창한 산맥이 아니라, 산이 커다란 줄기를 이루다가 마침내 그 100%의 소임을 다 하지 못해 끊기고 만, 굳이 표현하자면 ‘산 무더기 형태’의 줄기 다섯 개가 이어져서 흔히 이곳을 우링(五嶺)으로도 부른다.

지구를 종으로 횡으로 가르는 위도와 경도의 개념으로 표시하자면 이 난링과 우링은 북위 24°00′~26°30′,동경 110°~116°에 해당한다. 이곳은 또 다른 분계선이기도 하다. 앞서 소개한 장시(江西)와 저장(浙江) 등 중국의 이른바 ‘강남(江南) 지역’이 이곳에서 발을 멈춘다는 얘기다. 이 다섯 줄기의 산이 동서로 지나는 곳 남쪽 너머에 있는 지역은 더 이상 중국의 ‘강남’이 아니라는 말이다. 중아열대의 은근한 기운이 사라지고, 더욱 강렬한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남아열대는 이 다섯 무더기의 산을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따라서 ‘강남’이라는 말은 사라지고 대신 ‘화남(華南)’이라는 말이 자리를 잡는다. 굳이 그 단어를 풀자면 ‘중국 대륙의 남단’이라는 뜻이다.


난링의 한 모습이다. 험한 산길이 그 북쪽의 강남권과 남쪽의 광둥을 분명하게 가른다.

대한민국의 구역 명칭에 영남(嶺南)이란 게 있다. 경상도와 충청도 사이에 버티고 있는 문경의 새재, 즉 ‘조령(鳥嶺)’ 이남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똑같은 이치로 이 다섯 무더기의 산줄기 남쪽을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영남’이라고 적었다. 아마 중국에서 먼저 이런 이름을 달았을 것이고, 우리는 그를 차용했으리라….
우리가 이번에 들여다 볼 지역은 중국인들이 ‘嶺南’이라고 적는 곳, 바로 광둥(廣東)이다. 이곳의 행정 중심인 광저우(廣州)를 기점으로 남쪽 동편, 즉 광남동로(廣南東路)를 줄여 부른 것이 오늘날 광둥의 이름이 생긴 유래다. 그 서편은 광남서로(廣南西路)라고 적어 오늘 날의 광시(廣西)다.
황제의 수도가 있던 오늘날의 베이징이나, 옛날의 장안(長安) 또는 낙양(洛陽) 등에서 볼 때 이곳 광둥은 장시 또는 저장 등 다른 남부 지역과 함께 분명히 같은 ‘남쪽’에 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둥이 주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다른 남쪽 지역에 비해 훨씬 더 멀고, 매우 험한 지역이라는 느낌을 준다. 거리로 볼 때 다른 강남지역에 비해 수도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점, 아울러 높지는 않으나 험준한 산이 동서로 600여㎞ 걸쳐 있어 일정한 단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 등 때문이다.

이질적인, 너무나 이질적인 광둥

광둥에도 약칭(略稱)이 있다. 푸젠(福建)을 ‘민(閩)’으로 적고, 저장(浙江)을 ‘절(浙)’로 적으며, 바로 앞 회에서 소개한 산둥(山東)을 ‘로(魯)’로 적는 식이다. 각 지방마다 그를 간략하게 적는 글자가 다 있다. 광둥은 ‘월(粤)’로 적는다. 이 글자는 중국에 일찌감치 거주하다가 이제는 한족(漢族)이라는 문화 공동체에 흔적 없이 섞여 들어간 무수한 이족(異族) 가운데 하나로서, 장강 이남 지역에 숱하게 거주했던 비에트(Viet)족을 가리키는 ‘월(越)’과 같다.

이 역시 앞에서 자주 소개한 대목이다. 그 비에트 족의 갈래가 너무 다양해 전통 중국 사서에서는 이들을 백월(百越)로 표기했다. 그 백월이라는 존재를 현재의 우리가 중국 곳곳에서 체감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주 오래 전에 중국 남부를 터전으로 삼아 왕성하게 활동했던 그 비에트의 자취는 다른 어느 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광둥의 도회지 광저우를 상징하는 석상. 다섯 마리 양, 오양(五羊)에 관한 전설이 내려온다.
광저우는 이 때문에 양의 성, 즉 양청(羊城)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유일하게 그 전통적 맥락과 분위기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게 해주는 곳이 바로 이 광둥이다. 현대의 중국인들이 공식적인 이야기가 아닌, 일종의 ‘뒷담화’ 성격으로 자주 꺼내는 말이 있다. “광둥 사람들은 진짜 못 생겼다”는 말이다. 실제 사람의 생김새를 일률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든 지역의 사람들은 그 모든 지역의 지리적 환경과 인문적 환경이 만드는 조건에서 태어나 성장한다. 따라서 일반 중국인들의 “광둥 사람들은 못 생겼다”는 말은 일종의 종족적, 또는 지역적 편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중국에서 이 광둥 사람들의 생김새는 자주 화제에 오른다. 비아냥거림이 90% 이상 섞여 있는 말로 귀담아 들을 내용은 전혀 아니지만, 그렇게 화제에 오를 만큼 광둥 사람들의 생김새가 적어도 현대 일반적 중국인의 생김새와는 많이 다르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광둥 사람 중 70% 정도는 한족이 아니다.” 1990년대쯤인가, 어쨌든 그 무렵 한 연구 보고서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가뜩이나 생김새를 두고서 이러쿵저러쿵 많은 말을 쏟아냈던 중국인들이 광둥 사람들의 핏줄까지 들먹이기에 나섰던 것이다. 그 정도로 광둥은 사람의 생김새, 문화적 기질, 행동과 사고 등에서 두루 차별적 속성을 지녔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광둥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같지는 않다. 이 광둥은 문화 또는 종족 및 언어 상으로 적어도 3개 지역으로 나뉜다. 우선 유사 이래 줄곧 행정적인 구심점이었던 광저우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곳, 그리고 차오저우(潮州)와 산터우(汕頭)를 중심으로 이뤄진 동부지역, 난링 산맥 이남의 산간 지대로 이어지는 서북부 지역이다.
광둥의 문화적 맥락을 고스란히 이어가는 곳은 사실 광저우를 중심으로 한 중부 지역이다. 이곳의 언어가 바로 중국의 대표적인 방언 중 하나인 광둥화(廣東話)다. 이 광둥의 언어는 중국 지방 언어 중에 제법 큰 대표성을 지닌다. 손문(쑨원 孫文)이 촉발한 1911년의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2500여 년 이어진 전통왕조의 명맥이 끊긴 뒤 새로 출범하는 국민 정부에서 표준어를 무엇으로 정할지 투표를 한 적이 있다.



중국의 문호가 열렸던 계기는 영국과의 아편전쟁이다. 청나라는 이 전쟁에서 패해 마침내 문호를 개방한다.
그런 당시의 흐름 속에서 전쟁이 벌어졌던 광둥은 가장 선구적인 지역이었다.


마지막까지 경합한 게 현대 중국의 표준어인 베이징 중심의 푸퉁화(普通話)와 바로 이 광둥화다. 간발의 차이로 경합에서 떨어졌으니, 자칫 현대 중국인들은 이 광둥의 언어를 표준어로 삼을 뻔 했던 것이다. 그만큼 사용 인구도 많았으며, 중국을 대표할 만큼 상징적이기도 한 언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중국인들이 광둥화를 대하는 자세는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사람들이 모두 못 생겼다”고 편견을 드러내듯이, 이 광둥의 언어에도 “꼭 새가 떠들어대는 소리(鳥語)처럼 들린다”고 비아냥거리기 일쑤다. 그러나 광둥은 한때 베이징보다 문화적 수준이 높았다. 특히 영국과 미국의 문물이 마구 중국 땅으로 밀려들어오던 19세기 중후반의 광동 사정은 베이징이나 상하이를 훨씬 웃돌았다.
중국에서 가장 일찍 영국 등 유럽의 문화적 충격에 직면했던 곳이 바로 광둥이었기 때문이다. 아편전쟁이 벌어진 곳도 바로 광둥이었으며, 영국과의 싸움에서 패해 가장 남쪽의 어촌이었던 홍콩을 내준 곳도 바로 광둥이었다. 영국을 필두로 한 제국주의 철선(鐵船)들이 가장 먼저 닻을 내려 정박한 곳도 광둥이었으며, 그 뒤 벌어진 아편과 중국 찻잎 및 비단의 교역이 가장 활발하게 벌어졌던 곳도 광둥이었다.
그래서 광둥의 문화는 전통 왕조 시절의 오지(奧地)와 유배지(流配地)에서 졸지에 가장 선구적인 수준으로 올라선다. 모든 중국은 그런 광둥을 따라 배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영어인 Taxi가 광둥어 발음으로는 매우 그와 가까운 ‘的士(이를 광둥어로 발음하면 ‘띡시’, 베이징말로 발음하면 ‘디스’다. 광둥어가 원음에 훨씬 가깝다)’로 번역되고, 햄버거로 유명한 맥도날드를 ‘麥當勞(광둥어 발음 ‘맥당라오’, 베이징어 ‘마이당라오’) 번역한 이유다. 말하자면 외국의 문물을 광둥 식으로 받아들인 게 나중에는 중국 전역의 표준으로 작용했다는 얘기다.

2014-01-21 18:1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