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8화 영남에 살아 숨 쉬는 혁명의 기질 - 광둥(2)

비에트의 요소가 많이 보인다

아무래도 광둥은 비에트의 뿌리를 많이 간직한 모양이다. 약칭에서 드러나듯 장강 이남의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았던 그 많던 비에트 계의 원주민들은 북방에서 이주해 온 중원 지역 사람들에 밀리거나, 한 데 섞이면서 자신의 원래 정체성을 아예 잃거나 놓쳤을지 모른다.

그런 비에트의 자취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치자면 아무래도 광둥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이 지역에서 쓰이는 광둥어는 말의 높낮이를 표현하는 성조(聲調)가 모두 9개다. 광둥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베트남 언어의 성조는 8개다. 둘을 잘 모르는 사람이 눈을 감고 두 언어를 들으면 ‘거의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광둥어는 이 지역이 진시황(秦始皇)에 의해 점령된 이래 무려 2000년 동안 중원문화의 지배를 받은 말이다. 따라서 현재 광둥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의 상당수는 모두 한자어(漢字語)다. 그러나 중원으로부터 내려온 문자의 영향을 받아 그에 속했다고는 하지만, 그 원래 바탕의 구어(口語) 중 한자(漢字)로 표기할 수 없는 단어의 비율은 거의 25%에 육박하고 있다.


진시황에 이어 전한 시기의 지금 광둥에는 남월이라는 나라가 존재했다. 광둥을 상징하는 왕조이기도 하다.
남월이 남긴 당시 왕족의 수의(壽衣) 모습이다. 광저우의 남월 박물관에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중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한족(漢族) 문화의 세례를 거쳤으면서도 아직은 완전히 그 안으로 몰려 들어가 자취마저 없어진 상태는 아니라는 의미다. 여전히, 또 은근하게 원래의 비에트 적인 요소를 간직하며 유지하고 있는 게 광둥이다. 그 약칭이 수많은 비에트, 즉 백월(百越)의 의미를 띤 ‘粤’이라는 점은 그를 잘 말해준다.

그래서 광둥은 아무래도 다른 중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이질적(異質的)이랄 수밖에 없다. 말 자체가 워낙 베이징 및 상하이 등의 언어와 확연하게 다르고, 생김새도 어딘가 모르게 이국적이며, 풍속 등 다른 인문적 요소도 ‘수상하다’ 싶을 정도로 매우 다르다. 오죽하면 광둥 사람들 발음이 너무나 이상해 “하늘도, 땅도 두렵지 않다. 오직 광둥 사람들이 표준말하는 게 제일 무섭다(天不怕, 地不怕, 只怕廣東人講普通話)”라고 했을까.

그런 이질적인 요소가 이 광둥이라는 땅에 그대로 남아 있는 이유는 자명하다. 원래 간직한 비에트의 뿌리가 만만찮게 깊을 뿐만 아니라 길고 험한 다섯 개의 산줄기, 즉 오령(五嶺)이 그 북부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거리도 한 몫 한다. 베이징이나 낙양 등 전통 왕조에서 황제가 머물던 도읍으로부터의 거리로 따지면 광둥은 분명히 오지다. 따라서 황제의 권력, 그를 수행하는 중앙정부로부터의 간섭이 아무래도 적을 수밖에 없다.

이른바 황제나 중앙정부의 권력이 미치기에는 매우 먼 곳이라는 표현, 즉 ‘천고황제원(天高皇帝遠 하늘은 높고 황제는 멀리 떨어져 있다)’의 전형적인 예에 해당하는 곳이 바로 광둥이다. 그래서 이곳은 중앙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순순히 따르지 않는 경향이 있다. 광둥이 전형적인 반란, 또는 개혁과 혁명의 요람지(搖籃地)였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히 드러난다.


중국 개혁개방의 첨병인 선전. 중국 최남단에 이런 특구를 만들어 중국은 거대한 실험인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착수했다.
<중앙일보 조용철 기자 제공>

광둥은 전통적인 중국의 정치 환경에서만 그런 성향을 드러낸 것이 아니다.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과 개방으로 사회주의 중국에 대전환(大轉換)의 흐름을 만들어 낸 뒤 그 개혁의 첨병(尖兵)으로 선택한 곳이 바로 이 광둥이다. 영국에 할양한 홍콩과 바로 코를 맞대고 있는 선전(深圳)에 개혁 특구를 만들었고, 광저우를 포함한 주장(珠江) 삼각주 지역 모두를 외국에 개방했다.

그럼에도 광둥은 중앙정부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정부가 무슨 정책이라도 내놓으면, 그에 대한 대책(對策)을 내놓는 곳이 광둥이었다. ‘위에서 정책을 세우면, 아래에서는 대책을 세운다(上有政策, 下有對策)’는 말을 낳았던 곳이 바로 광둥이다. 정부의 지침에 따르지 않고 늘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을 찾아 움직였다는 이야기다. 이 말은 나중에 중앙정부의 정책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 자신의 발전을 꾀하는 지방정부의 이기적 속성을 말할 때 자주 쓰였을 정도로 발전했다.

어쩌면 이를 반골(反骨)의 기질로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위에서 하자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따르지 않는 점, 아울러 물리적인 거리는 매우 많이 떨어져 있어서 중앙정부의 권력과는 상관없이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점, 역사와 인문적인 전통이 북부의 그것과는 매우 다른 줄기를 형성한다는 점 등이 그렇다.

그나마 정부의 통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 그 점이 다행이랄까. 광둥은 때로 그런 경계 밖으로 치닫기 일쑤였다. 역시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중앙정부의 간섭과 견제가 제 ‘약발’을 거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큰 풍파를 일으킨 사건은 아무래도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亂)’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을 일대 혼란으로 몰고 갔던 태평천국의 난.


1851년 중국 남부에서 불붙기 시작해 한때 지금의 난징(南京)을 점령해 왕조의 출범까지 알렸던, 중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최후의 농민 반란이다. 그 핵심 인물은 홍수전(洪秀全)과 양수청(楊秀淸)이다. 그 둘 모두 광둥 출신이다. 이들은 광둥 서북부의 산간 지대에 살았던 객가(客家) 출신이다. 나머지 태평천국의 최고 권력을 구성했던 지도자 대부분도 역시 객가의 피를 받은 사람들로서, 단지 차이가 있다면 출신지가 서쪽으로 인접한 광시(廣西)라는 점이다.

이 태평천국의 반란은 중국 전통 왕조의 명맥을 마지막으로 잇고 있던 청(淸)나라 정부를 심각하게 위협했다. 중국 남부 거의 모든 지역이 이들의 수준에 넘어가 마침내는 베이징에 있던 청나라 왕조 자체가 존폐의 위기에까지 몰리기도 했다. 10여 년 넘게 이어진 태평천국 운동으로 중국 전체는 거대한 혼란으로 휩싸였다.

               
2014-01-22 10:4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