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화 영남에 살아 숨 쉬는 혁명의 기질 - 광둥(3)

마침내 왕조를 무너뜨린 광둥

홍수전은 그런 점에서 중국 근현대의 역사 중에서 단연 특기할 만한 인물이다. 그러나 홍수전은 결국 왕조의 마지막 명맥을 끊지 못했다. 거세게 그 운명을 흔들었지만 결국에는 반란에 이은 혁명으로까지 발걸음을 내딛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고향 후배인 손문(쑨원)은 조금 달랐다.


광둥이 낳은 풍운의 혁명가 홍수전. 태평천국을 이끈 광둥 출신의 인물이다.


대만에서는 국부(國父)로 추앙받고, 대륙을 석권한 공산당으로부터도 최고의 존경을 받고 있는 손문 역시 광둥 출신이다. 그는 기우뚱거리는 청나라의 마지막 운명에 날카로운 칼을 들이대 그 숨통을 끊어 놓은 풍운의 혁명가다. 그의 별명은 거침없이 말을 한다고 해서 ‘손대포(孫大砲)’. 아직 왕조의 행정력이 엄존하고 있던 19세기 말에 그는 겁 없이 떠들어대기 일쑤였다.

“이제 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정권을 세워야 한다”고 큰소리를 쳐대면서 중국 곳곳을 돌아다니는가 하면, 미국이나 일본 및 유럽 등을 여행하면서 혁명을 위한 조직 구성과 자금 마련에 어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마침내 그의 분주한 활동으로 1911년 후베이(湖北) 우창(武昌)에서 기습적인 반란이 일었고, 이는 다시 청나라 정부의 권력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리는 계기로 발전했다. 우리는 그를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기록하며, 2500년 중국 왕조사를 허물었던 일대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1866년 광둥의 중산(中山)에서 태어난 그는 의학(醫學)을 전공하면서도 일찌감치 봉건 왕조를 뒤엎겠다는 뜻을 키웠다. 28세 때인 1894년에는 당대의 실권자였던 청나라 대신 이홍장(李鴻章)을 톈진(天津)으로 찾아가 개혁에 관한 제언을 내놨으나 문전박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미국과 일본 등을 여행하며, 모두 5차례 세계여행에 나서 해외에 있는 중국 화교들의 뜻을 모아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를 결성했다. 이를 바탕으로 끈질기게 중국의 반봉건, 반 왕조의 혁명을 꿈꾸며 모두 10여 차례의 무장폭동을 주도한 뒤 신해혁명을 거쳐 중국 혁명의 리더로 발돋움했다.


변법유신으로 청나라를 개혁하고자 했던 강유위(왼쪽)와 신해혁명을 주도해 2500년 중국 왕조사의 명맥을 끊어버린 혁명가 손문. 둘 다 광둥에서 자라난 풍운아다.

홍수전이나 손문은 모두 지금의 광저우 인근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지금의 포산(佛山)이라는 곳도 광저우 인근, 넓게 말해서는 모두 주장(珠江) 삼각주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 포산의 난하이(南海)현이라는 곳도 청나라 말엽 중국의 개혁을 꿈 꿨던 풍운의 인물 하나를 낳았다. 그 이름은 강유위(康有爲)다.

그는 저서 『대동서(大同書)』로 한국인에게도 매우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 내용은 다양하지만, 한 마디로 그를 정리하자면 중국의 봉건 왕조 역사를 청산하고 헌정(憲政)을 도입해 중국을 근대 국가로 탈바꿈시키자는 것이다. 최초로 헌법(憲法)에 의한 정치체제를 역설함으로써 봉건 왕조의 압제를 끝내고 서양의 효율적이며 합리적인 정치사상을 끌어들이자는 주장이었다. 방법에 있어서는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채택함으로써 비교적 온건한 노선을 드러냈지만, 2500년 이상 이어져 온 중국의 봉건 왕조 체제로서는 혁명적 제안이기도 했다.

청나라 광서제(光緖帝)를 등에 업고 변법유신(變法維新) 운동을 벌이다가 서태후(西太后)와 원세개(袁世凱)에 의해 좌절한 사건은 아주 유명하다. 그 밑의 제자 양계초(梁啓超)도 광둥이 낳은 유명 인물이다. 강유위가 1854년 출생이고, 양계초는 1873년생이다. 유신과 변법으로 의기가 투합한 양계초가 강유위의 문하에 들어감으로써 둘은 사실 상 사제(師弟)의 의리로 맺어진 사이다.

양계초 역시 스승 강유위를 따라 열심히 변법 운동을 펼치다가 결국 광서제의 실각에 따라 100여 일 동안 펼친 ‘유신 헌정’의 꿈을 접고 해외로 도피했다. 이들의 좌절을 중국 역사에서는 ‘백일유신(百日維新)’이라고 적는다. 양계초는 뛰어난 머리로 동서양의 학문을 섭렵해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 등의 저작을 남겨 동양의 지식사회에 커다란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그 역시 광둥이 낳은 혁명가적 기질의 인물이다.



강렬함을 넘는 맹렬함

앞서 소개한 장시(江西)와 후베이(湖北)를 중국 강남 문화의 낭만적인 상상력이 낳는 굳고 매서움의 ‘강렬(剛烈)’함으로 표현한 점을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그곳 강남 문화의 자유스러움이 한 곳에 몰릴 때 그런 강렬함이 나온다고 풀었는데, 광둥은 어떻게 보면 그런 강렬함을 조금 더 넘어서는 ‘맹렬(猛烈)함’을 간직하고 있는 곳인지 모른다.

홍수전에서 손문으로 이어지는 혁명가적 기질, 그리고 변법을 시도하며 왕조 체제의 커다란 변혁을 이끌려고 했던 강유위와 양계초의 개혁가적 기질이 다 그렇다. 난링 또는 우링이라는 길고 험준한 산맥 이남에서 만들어진, 초나라의 자유스러움과 낭만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발전시킨 숱한 비에트 계통의 일탈(逸脫)적인 문화바탕이 그를 부추겼을지 곰곰이 따져 볼 일이다.


강유위의 제자로서 청나라 말 개혁에 앞장섰던 양계초(왼쪽)와 영화 ‘황비홍’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무예의 고수 황비홍의 실제 모습(오른쪽).


황비홍의 고향 후배이자 요즘 중국 영화 ‘일대종사’의 실제 주인공 엽문(왼쪽)이 현대의 쿵푸스타 리샤오룽(브루스 리)를 가르치고 있다. 둘 다 광둥 포산이 고향이거나 원적지다.



절세의 쿵푸 스타 리샤오룽(李小龍)의 원적지도 포산이다. 아울러 그를 가르쳤다는 요즘 중국 영화 ‘일대종사(一代宗師)’의 주인공 엽문(葉問)도 고향이 이 포산이다. 포산에서만 황비홍과 엽문, 나아가 리샤오룽이 나왔다. 이 포산은 중국 남부에서 알아주는 ‘무예의 고향’이라고 한다. 그런 무예의 고수가 나올 만큼 이곳은 늘 싸움이 불붙었던 곳으로 봐야 한다. 그 싸움이 어떻게 번지며, 도대체 누가 누구를 상대로 싸워야 했는지는 나중에 더 따질 일이다. 어쨌거나 늘 싸움을 준비해야 하는 환경 속에서 광둥은 무예를 키웠고, 그런 환경 속에서 상당히 높은 수준에 오른 무인들이 나왔을 것이다.

명(明)나라 장군으로서 청나라의 침입을 효율적으로 막다가 억울하게 죽은 원숭환(袁崇煥), 중국 10대 원수(元帥)로서 문화혁명을 이끈 극좌의 사인방(四人幇)을 제거해 덩샤오핑(鄧小平)의 복귀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예젠잉(葉劍英)도 객가의 핏줄을 타고 이곳에서 태어난 무인이다.

광둥성 동쪽은 차오저우와 산터우가 대변하는 ‘차오산(潮汕)’ 문화권이다. 이들은 어계(語系)는 광저우를 중심으로 하는 광둥화와 다르다. 광둥성 동쪽으로 인접한 푸젠(福建)의 민난(閩南) 어계에 더 가깝다. 말이 틀린 만큼 문화의 질도 다르다. 거센 광둥의 기질보다는 좀 더 치밀하고 노련하면서 대범한 기질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리카싱(李嘉誠)이다. 그는 중국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부자’로 꼽히는 사람이다. 젊은 시절 플라스틱 조화(造花)를 만들면서 차츰 성장한 리카싱은 홍콩에서 부동산에 눈뜨면서 중국 최고의 부자라는 타이틀을 얻기에 이르렀다. 그를 키운 ‘차오산’의 문화권은 동향 출신을 치밀하게 뒷받침해 거대한 상인으로 키우는 토양이 발달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울러 싱가포르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리콴유(李光耀)도 원적지가 광둥이다. 북부 객가 혈통을 지닌 사람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 역시 강력한 리더십으로 오늘 날의 싱가포르를 키운 정치인이다.

인접한 푸젠 못지않게 광둥 역시 ‘바다’의 꿈을 안은 해양성 문화다. 그래서 광둥 출신 화교 원적지가 광둥인 싱가포르의 리콴유(왼쪽)와 중국에서 가장 부자로 꼽히고 있는 리카싱의 수는 20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들은 광둥 경제의 활력소다. 해외로 나갔다가 고향에 투자하는 광둥 출신 화교들을 ‘해외병단(海外兵團)’이라고 부를 만큼 이들의 힘은 막강하다. 해양의 특징이 무엇인가. 바닷길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천변만화(千變萬化)의 험로(險路)다. 그에 굴하지 않고 바닷길에 서야 했던 수많은 광둥 사람들에게 싹튼 정신은 무엇일까. 모험이기도 하고, 수없이 닥치는 변화에 대한 대응일 것이다.

               
2014-01-22 10:4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