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0화 바다로 나가는 툭 트인 땅 - 상하이(1)

지금으로부터 2700여 년 전. 당시의 초(楚)나라에 속했던 땅은 중국 대륙의 중간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물줄기인 장강(長江)의 영향을 받아 매우 습하고 무더웠다. 구름이 많이 끼고, 비 또한 많이 내린다. 길면서 수량 또한 많은 하천이 무수히 발달했고, 그로부터 생겨나는 운무(雲霧)가 많아 그 일대는 ‘구름과 꿈의 대지(雲夢大澤)’로도 불렸다.

옛 초나라 방언에서 꿈을 뜻하는 ‘몽(夢)’이라는 글자가 ‘호수(湖水)’를 의미했다고 하는 점은 우리가 깊이 새겨볼 대목이다. 어쨌든 무수한 하천이 흐르고, 그 물이 모이는 곳에는 아주 대단한 크기의 호수가 생겼다. 그 위에는 지척을 분간키도 어려운 구름과 안개가 늘 잔뜩 끼어드니 그곳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은 적지 않은 상상력과 낭만, 깊고 그윽한 유현(幽玄)의 사고를 키웠으리라.


일찌감치 국제적인 도시였던 상하이의 야경. 동서양의 문화가 만나 늘 새로운 무언가를 향해 꿈틀거리는 곳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을 상징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이 연재를 통해 둘러 본 여러 지역은 이런 환경에 놓였던 곳이다. 단지 산둥(山東)을 제외하고서는 말이다. 저장(浙江), 후베이(湖北), 장시(江西) 등이 꼭 그렇다. 푸젠(福建)과 쓰촨(四川), 광둥(廣東)은 그보다 더 남쪽에 있어 그런 요소가 덜하다고 볼 수 있지만, 인문지리적 환경을 따지자면 역시 동류(同類)에 속한다.

중국 대륙의 복판을 가로지르는 장강 이남은 대개가 그렇다. 그 장강 이남의 여러 지역을 대변하는 도시가 있다. 6300㎞에 달하는 장강의 머리 부분, 즉 전체를 용(龍)으로 형상화할 때 그 앞인 용두(龍頭)에 해당하는 곳인 상하이(上海)다. 170년 전에는 그저 그런, 매우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던 이곳에 변화의 구름이 몰려왔다.


물고기 잡이 어살, 그리고 춘신군(春申君)

상하이의 약칭(略稱)은 ‘호(滬)’다. 이 글자는 대나무로 만든 어살을 뜻한다. 물이 흐르는 곳에 죽 늘어놓아 고기를 잡는 도구다. 지금도 상하이의 자동차 번호판에는 이 약칭이 붙는다. 이 정도에서 우리는 상하이가 한적한 어촌의 하나였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겠다.

상하이를 상징하는 강이 있다. 지금도 시내 한 자락을 흐르는 쑤저우허(蘇州河)다. 비교적 짧은 하천이다. 이 강은 황푸(黃浦)강으로 흘러들어 마침내 바다에 닿는다. 황푸 또한 상하이의 상징이기는 하지만, 쑤저우허가 원래는 쑹장(松江)이라는 이름으로 상하이를 상징했다. 따라서 상하이의 옛 이름을 적을 때는 이 강도 등장한다.


지금의 상하이를 발판으로 활동했던 전국시대 춘신군의 모습 상상도.
그는 식객 3000명을 거느렸던 전국시대 유명한 정치인이다.


상하이의 또 다른 별칭은 ‘신(申)’이다. 이 이름은 2300여 년 전 전국시대(戰國時代) 초나라의 귀족이었던 춘신군(春申君 BC314~BC238년)에서 유래했다. 그는 식객(食客)만 3000명을 거느렸다는, 인재의 등용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의 원명은 황헐(黃歇)이다. 원래는 지금의 허난(河南)에서 출생했으나 초나라 귀족으로 상하이 일대를 봉지(封地)로 받아 활동했다고 한다.

쑤저우허와 함께 상하이의 큰 상징인 황푸라는 강의 이름은 결국 그로부터 나왔다. 그의 성씨(姓氏)인 ‘황(黃)’이라는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 황푸라는 얘기다. 따라서 그의 별칭인 춘신군의 ‘신(申)’이라는 글자 또한 상하이를 상징하는 글자다.

화정(華亭)이라는 이름도 있다. 삼국시대 조조(曹操)의 위(魏), 유비(劉備)의 촉(蜀)나라와 대립각을 형성했던 나라가 오(吳)다. 이 오나라에는 유명한 장수가 여럿 있었다. 주유(周瑜)가 우선이고, 노숙(魯肅)과 여몽(呂蒙)이 뒤를 따른다. 촉나라 유비는 인생 막바지에 커다란 전쟁을 벌인다. 촉나라 군사를 대거 거느리고 장강의 삼협(三峽)을 빠져 나와 이릉(夷陵 지금의 宜昌 동쪽)이라는 곳에서 운명의 결전에 임한다.

유비를 맞이한 오나라 장수가 바로 육손(陸遜)이다. 육손은 그 이릉의 대전에서 우선은 밀리는 척한다. 중요한 전략 거점을 먼저 내주고 유비의 막강한 군대가 처음에 지녔던 예기(銳氣)가 꺾이기를 기다린다. 그 다음에 유명한 화공(火攻)을 펼쳐 유비의 군대에 막대한 패배를 안긴다. 유비는 삼협 중간의 백제성(白帝城)으로 쫓긴 뒤 결국 자신의 아들을 제갈량에 맡긴다는 ‘탁고(托孤)’의 일화를 남기고 죽는다.


삼국지 영웅 유비를 막바지에 크게 꺾어 결국 절명케 한 오나라 명장 육손.
그 역시 지금의 상하이를 근거지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 육손은 오나라 왕실에 의해 화정후(華亭侯)에 봉해진다. 육손이 자신의 봉읍(封邑)으로 거느렸던 곳이 바로 상하이, 또는 그 인근이다. 따라서 상하이는 별칭으로 ‘화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상하이의 이름이 이렇게 많다. 한적한 어촌이라는 의미, 전국시대 화려하게 생활하며 수많은 식객을 거느렸던 춘신군, 유비를 절명케 한 전쟁의 주역인 육손의 그림자 등이 모두 어려 있는 곳이다.

그러나 상하이가 중국인들의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 때는 그런 춘신군과 육손이 활동하던 시절로부터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다. 1843년 상하이는 문을 열었다.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문을 열었던 것이 아니다. 그 전에 벌어진 아편(鴉片)전쟁이 몰고 온 여파였다. 영국에 무릎을 꿇은 청나라 왕실은 전쟁에 진 대가로 영국과 1842년 ‘남경조약(南京條約)’을 체결했다. 이로써 영국이 지정한 5개의 항구를 개방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상하이였다.

그 이후의 상하이시 변천사는 알 사람은 다 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이 진출해 그 땅을 아예 차지해 버린 조차지(租借地)로서의 역사 말이다. 상하이는 그럼 굴욕의 도시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비록 힘에 의해 유럽 열강 등에 땅을 내줬지만 굴욕의 정한(情恨)만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아편전쟁으로 일찍이 문호를 개방했던 상하이 와이탄의 옛 모습.
조차지로 구역을 서양 열강에 할애함으로써 서구 문물이 가장 왕성하게 몰려 들었던 곳이다.

               
2014-01-22 10:4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