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화 바다로 나가는 툭 트인 땅 - 상하이(2)

십리(十里)가 양장(洋場)이라

상하이는 제국 열강이 중국으로 몰려들면서 번성했던 곳이다. 초기에 영국 등 유럽 열강이 찾았던 곳은 광둥(廣東)이었다. 먼저 홍콩을 얻었고, 이어서 주룽(九龍) 반도, 또 광저우(廣州)를 비롯한 주장(珠江) 삼각주 지역을 드나들었다. 그러나 내륙으로의 진출을 위해서는 상하이가 더 필요했다.

길게 뻗어 내륙 저 깊숙한 곳까지 수운(水運)이 가능한 장강을 따라 중국 전역을 상대로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상하이가 안성맞춤이었다. 그런 이유로 상하이는 유럽 열강 등으로부터 각광을 받았다. 따라서 유럽과 미국 등의 백인이 끊임없이 몰려들었고, 상하이는 그런 흐름 속에 번창을 구가했다.

그런 모습을 형용한 말이 ‘십리양장(十里洋場)’이다. 거리의 모든 구석이 다 백인의 차지였고, 그들이 몰고 온 문명적 요소들이 가득 들어찼다는 말이다. 여기서 ‘양(洋)’은 중국인이 흔히 백인을 일컬을 때 ‘양인(洋人)’이라고 했던 그 의미다. 거리 곳곳에 몰려다니는 백인들, 그리고 그들이 거느리고 온 수많은 서양의 문물들이 거리를 메우면서 이 상하이는 ‘동양의 파리’라는 별칭도 얻었다.


20세기 초의 상하이 시가지 모습. ‘동양의 파리’로 불렸을 만큼 상하이는 동서양의 문물이 크게 융합하던 국제적인 도시였다.

아울러 백인들 또한 이 도시의 매력에 흠뻑 빠져 들었다. ‘극동의 제1 도시’라고 부르거나, 심지어는 너무 매력적이어서 아예 ‘마술과 같은 도시(魔都)’로 부르기도 했다. 상하이는 백인들에게 장강의 꼭짓점, 그로부터 중국 전역을 향해 뻗어갈 수 있는 ‘기회’와 ‘꿈’의 도시이기도 했다.

그렇듯 외국인만 몰려든 게 아니었다. 문물이 번창하고, 비즈니스의 기회가 많아지면서 중국 내륙의 수많은 인구들도 이 도시를 향해 모여 들기 시작했다. ‘도시화’는 요즘의 주제만이 아니었다. 문물이 번창한 곳으로 사람들은 꼬여 들기 마련이었고, 그런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19세기 중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상하이는 급격한 도시화의 흐름 속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전통 왕조의 통치 기반인 베이징(北京)에는 사합원(四合院)이라는 전통 주택이 발달했다. 동서남북의 네(四) 벽면이 가운데에 있는 뜰(院)을 향해 모여 있는(合) 형태의 주택이다. 우리 식으로 쉽게 말하자면 ‘ㅁ’자(字) 모습의 집이다. 동서남북의 방위(方位)가 뚜렷하고, 남북을 잇는 축선이 발달했으며, 그런 방위와 축선에 따라 가부장적인 위계(位階)의 관념을 매우 엄격하게 강조한 주택이다.

이 사합원은 나중에 소개할 기회가 있겠으나, 어쨌든 중국 전역을 다스리는 황제(皇帝)와 그 왕조(王朝)의 통치적 질서를 그대로 소화했거나, 아니면 그에 고스란히 적응한 형태의 주택이다. 매우 권위적이며 안정적이다. 사방의 모든 벽면이 뜰을 향해 모여 있어 외부로는 완연한 성채를 연상케 하는 구조다. 따라서 개방형이라기보다 폐쇄형이다. 안을 향해 웅크리고 밖을 거부하는 몸짓의 사내를 연상하면 좋다.

그에 비해 십리양장의 번화한 곳에 들어선 상하이의 전통 주택은 컬러가 완전히 다르다. 중국인은 이 무렵 무수하게 들어선 상하이와 그 인근의 전통적 주택을 석고문(石庫門)이라고 적는다. 이 이름이 어디서 연유했는지는 정확히 고증하기 쉽지 않다. 단지 집 대문을 장식할 때 석재(石材)를 사용해 핵심 부위를 잇는 데서 나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현지 방언 때문에 곳집을 뜻하는 ‘고(庫)’가 그런 의미를 얻었다는 얘기다.

‘십리양장’ ‘동양의 파리’ ‘마술과 같은 도시’인 상하이에 몰려들었던 수많은 중국인들이 이 집을 짓기 시작해 이는 현재까지 상하이의 대표적인 민가(民家) 건축 양식으로 남아 있다.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는 석고문을 보면, 우선은 중국 전통 양식과 서양 건축 양식의 혼용(混用)임이 분명하다.


상하이 전통 주택 석고문의 모습이다. 다세대가 혼거(混居)하기 쉬운 형태의 주택이다.

일제 강점 시절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머물렀던 상하이의 마당루(馬當路) 유적지를 가보면 이 상하이의 석고문 양식을 직접 살필 수 있다. 먼저 빽빽이 들어서 있는 2~3층의 연립주택 형태의 집들이 좁은 길 양쪽에 들어서 있다. 그 각 주택의 문이 둥그런 아치 형태다. 아울러 그 두 열(列)의 연립 주택에 들어서는 골목길 앞에도 커다란 대문이 있다. 역시 둥그런 아치를 머리에 얹은 모습이다.

베이징의 전통 주택인 사합원이 엄격한 위계와 축선을 바탕으로 한 양식이라면, 이 상하이의 석고문은 ‘혼융(混融)’을 상징한다. 섞여서 한 데 어우러지는 모습의 그런 혼융이다. 우선 건축 양식 자체가 중국 강남(江南) 지역의 여러 민가 양식을 바탕으로 서양의 구조를 섞었다. 중국과 서양의 양식이 어울린 형태다.

아울러 권문세가(權門勢家)의 극히 일부분 저택을 빼놓고는 이 석고문에는 여러 세대가 섞여 살았다. 도시로 밀려든 농촌의 수많은 인구들은 이 석고문의 연립 형태 주택 한 구석을 빌려 조그만 방에 여러 식구가 몸을 섞으며 살았다고 한다. 잠은 위의 조그만 방에서 가족들과 섞여 자고, 취사(炊事)와 세면 등은 공동의 구역에서 함께 해결하는 방식이었다.

황제의 성채인 자금성(紫禁城)이 있는 베이징 사합원이 엄격한 구획을 자랑하며 질서와 위계를 뽐냈다면, 상하이의 석고문은 양식 자체부터가 혼융이었고, 그 안에 사는 상하이 사람들의 삶 자체를 섞임과 어우러짐으로 몰아간 것이다. 상하이는 그렇게 모든 것을 섞는 데서 일정한 흐름을 유지한다.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던 상하이는 18세기의 어느 한 시공에서 그렇게 일어섰다. 세계의 이목을 모으는 혼융의 도시로서 말이다.

               
2014-01-22 10:4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