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화 바다로 나가는 툭 트인 땅 - 상하이(3)

서광계와 마테오리치, 그리고 『기하원본(幾何原本)』

1.1.1. 이 상하이를 대표하는 인물은 누구일까. 전국시대 춘신군을 논하자니 조금 개운치 않다. 춘신군의 태생지는 이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초나라 귀족으로 이곳을 봉읍으로 받았다는 점 외에 그가 오늘날의 상하이를 설명할 때 자신의 요소를 보탤 게 없다. 그렇다면 유비의 군대를 무찔러 일약 중국 전쟁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스타 장군’으로 발돋움한 육손은 어떨까.


상하이를 상징하는 인물 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기하원본』을 번역해 서구 문명의 토대를 중국에 끌어들인 서광계다.


그 역시 대표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개운치 않다. 육손 역시 상하이가 출생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상하이에 인접한 쑤저우(蘇州)가 고향이다. 그가 오나라에서 쌓은 찬란한 전적으로 인해 화정후에 봉해져 상하이와 인연을 맺은 점은 분명하나, 그 역시 오늘날의 상하이를 대표할 만큼 자격이 충분치는 않다.

중국인 스스로도 상하이를 대표할 만한 인물을 꼽으라면 망설인다. 중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많은 인물이 상하이를 기반으로 활동했지만, 순수하게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의 요소를 자신에게 채운 뒤 이름을 얻은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하이 출생으로 중국 근대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 하나가 있다.

바로 서광계(徐光啓 1562~1633년)다. 그의 직업은 무엇일까. 중국인이 정리한 자료에는 그가 ‘수학가, 과학가, 농학가, 정치가, 군사가’였다고 적혀 있다. ‘정치가’는 그가 과거의 여느 중국 엘리트들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길에 들어서 급제한 뒤 벼슬아치로서의 생애를 살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중요한 한 두 차례의 전쟁에서도 실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군사가’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그의 이름 앞에 먼저 나열한 ‘수학가’이자 ‘과학가’의 타이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쌓았다. 수학이 발달한 전통의 중국이었지만, 그런 중국이 결코 보지 못했던 분야를 보도록 만들었던 인물이 바로 서광계다. 아울러 그런 수학적 업적을 토대로 중국의 과학을 업그레이드시킨 사람도 바로 그다.

그의 고향은 송강부(松江府) 상해현(上海縣)이다. 지금의 상하이가 바로 고향이라는 얘기다. 그때의 상하이는 ‘십리양장’ ‘동양의 파리’라고 일컬어졌던 300년 뒤의 상하이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사방에 논밭이 깔려 있고, 동쪽으로는 끝없는 바다만 펼쳐져 있던 한적한 농어촌이었다. 그는 상인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일찌감치 과거에 뜻을 두고 공부를 했다.

19세 때 지방 향시에 응시해 합격했으나,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진사시에서는 거듭 고배를 들었다. 그는 그런 와중에서도 농지를 개간하고, 그곳에 물을 대는 수리에 골몰했으며, 그 둘의 토대를 이루는 천문(天文)과 수리(數理)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사물의 실질을 중시하며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적 성향을 보인 셈이다.


서광계에게 『기하원본』을 전한 마테오리치. 중국에 서양 문명의 진수를 전수한 주인공이다.

그런 그가 1593년 무렵 처음 서양의 선교사와 접촉한다. 서양의 선교사는 카타네오(L.Cattaneo)라는 인물이었다. 서광계는 그로부터 처음 세계지도를 봤다고 한다. 중국 외에도 드넓은 세계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포르투칼 출신의 스페인 항해사 마젤란이라는 인물이 지구를 돌아 항해함으로써 지구가 둥글다는 점을 증명했다는 사실도 들었다.

그로부터 다시 7년 정도가 흘렀다. 이번에도 그는 서양의 한 인물을 직접 찾아간다. 바로 마테오리치(1552~1610년)였다. 마테오리치는 일찌감치 중국에 들어와 선교에 몰두하고 있었다. 중국어를 제대로 익혔고, 전통 학문의 바탕인 한학(漢學)에도 조예가 깊어 그는 당시 중국에서 이름을 높여가고 있었다. 그런 마테오리치를 난징(南京)으로 찾아간 서광계의 관심은 무엇이었을까.


마테오리치와 서광계를 함께 그린 이 그림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마테오리치는 자연과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던 서광계의 요구에 처음에는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대신 마테오리치는 자신이 중국어로 번역한 『천주실의(天主實義)』 등 종교 서적을 건넸다고 한다. 그로부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가 궁금하다. 그러나 어쨌든 3년 뒤에 서광계는 자신의 가족을 모두 데리고 마테오리치가 있던 난징으로 가서 천주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그 점이 바로 ‘계기(契機)’였던 듯싶다. 1607년 마테오리치는 그 유명한 『유클리드 원본』의 내용을 서광계에게 전수한다. 나중에 서광계는 마테오리치와 함께 그 책을 한문(漢文)으로 번역해 『기하원본(幾何原本)』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한다. 이틀에 한 번씩 마테오리치는 서광계에게 그를 강의했고, 일찌감치부터 실학(實學)의 취향이 농후했던 서광계는 그를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흡수한다. 그리고 둘은 마침내 책을 완역하기에 이른다.

문명사의 흐름에 관심을 둔 사람들은 알 것이다. 마테오리치를 만난 서광계로 인해 중국, 나아가 동양의 수학사에서 기하학의 개념과 시각이 접목됐다는 사실의 중대한 의미를 말이다. 중국 수학은 대수(代數)가 주류를 이뤘다. 그것도 세계에서 으뜸이라고 꼽힐 정도의 대수 수준을 만들어낸 곳이 중국이다. 그러나 ‘평면’ 지향의 대수가 ‘입체’의 기하학으로 발전하지 못한 점은 중국 수학, 나아가 동양 수학사에서는 일종의 미스터리다.

서광계의 번역을 거쳐 나온 평행선(平行線), 삼각형(三角形), 직각(直角), 예각(銳角), 둔각(鈍角) 등은 지금도 우리가 사용하는 기하학 개념이다. 아울러 기하(幾何)라는 단어 자체도 마테오리치가 들고 온 유클리드 원본 내용 중의 ‘Geo(측량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다.

그의 업적은 다양하다. 나중에는 천문에 깊이 관여해 청나라 천문 역법에 관한 토대를 형성했고, 농법(農法)과 무기 및 화약 제조에도 발을 들였다. 왕조 시대의 문인 관료로 큰 공을 쌓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평범한 관찰에 불과하다. 그를 통해 서양 수리와 천문, 물리, 농법 등이 중국에 접목됐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 점은 어찌 보면 동양문명과 서양문명의 커다란 조우(遭遇)였던 셈이고, 서광계는 그 접점을 만든 사람일 것이다.

그 서광계가 태어나고 자랐던 터전은 지금의 상하이시에 쉬자후이(徐家匯)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그가 지방 향시에서 급제한 뒤 진사 시험에 번번이 낙방하면서도 끊임없이 농법 개량에 골몰했던 현장이다. 그는 죽어서 이곳에 묻혔고,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이곳에서 번성했다고 전해진다.

수많았던 별들은 뜨고 지고

상하이는 낭만과 꿈의 도시다. 170년 전에 대문을 열어젖힌 대륙의 항구로부터, 제국 열강이 중국을 경략하기 위해 발을 들였던 국제적 도시로, 나중에는 다시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뒤 개혁과 개방의 선두 주자를 자임하며 중국의 경제적 활력을 대변했던 곳이다.

그렇게 이곳에 닥친 역사의 화려한 풍상과 함께 뜨고 진 별들이 무수히 많다. 중국 현대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루쉰(魯迅)의 무대도 상하이였다. 그는 고향이 저장(浙江)의 사오싱(紹興)이지만 상하이를 배경으로 글을 쓰고 발표하면서 문단의 거두로 성장했다.

마오둔(茅盾)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중국 현대문학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심심찮게 오르던 중국의 문호 바진(巴金)도 같은 경우다. 영화 ‘색계(色戒)’의 원작 소설을 지은 장아이링(張愛玲)도 상하이에서 큰 이름을 떨쳤던 문인이다.

중국 1990년대 권력의 상징이었던 ‘상하이방(上海幇)’도 유명하다. 장쩌민(江澤民), 쩡칭훙(曾慶紅), 우방궈(吳邦國), 황쥐(黃菊), 주룽지(朱鎔基) 등으로 짜인 상하이방은 1980년대 후반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 개방 방침을 충실하게 이어간 현대 중국 경제발전의 주역들이다.



중국 흑사회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었던 두월생. 20세기 초 상하이를 주름잡던 중국 최고의 주먹이다.


이념과 노선 갈등으로 반발이 심했던 중국 개혁개방의 역사에서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에 가장 선도적인 입장을 취했던 상하이 인맥에게 마침내 지속적인 중국 개혁개방의 대임(大任)을 맡겼다는 점은 여러 가지를 시사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두위에성(杜月笙 1888~1951년)이라는 인물도 특기할 만하다. 그는 중국 최고의 ‘주먹’이다.

지금의 상하이 푸둥(浦東)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과일 행상 등으로 어렵게 생활하다가 빼어난 재간으로 중국 조폭(組暴)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뒤 승승장구했던 인물이다. 교활하면서도 대담하고, 잔인하면서도 때로는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며, 교활하면서도 의리를 따졌던 인물로 중국 조폭의 역사에서 크게 자취를 선보였다.

상하이는 탄(灘)이다. 우리는 이 글자를 ‘여울’ 또는 ‘여울목’으로 해석한다. 돌이 쌓이거나 고랑 등이 많아 물이 지나갈 때 소리를 많이 내는 곳이다. 중국에서는 하천이 바다로 나가는 출구다. 그곳에 긴 강의 흐름이 운반한 거대한 토사가 쌓여 새로 만들어지는 땅의 뜻이다. 그래서 상하이는 흔히 ‘상하이탄(上海灘)’으로 적는다.


홍콩스타 저우룬파 등이 주연한 드라마 ‘상하이탄’. 거대한 장강의 물줄기가 바다로 빠져나가는 곳이 바로 상하이탄이다. 그 상하이탄의 역사 무대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명멸했다. 상하이는 그렇게 모든 것이 섞이고 또 섞이며 혼융의 큰 리듬을 만드는 곳이다.

그 상하이는 길고 긴 장강이 바다로 흘러들면서 생긴 거대한 충적토(沖積土) 위에 세워진 도시다. 강은 자신이 지나온 흐름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장강의 뒷물결은 앞물결을 밀어내는데, 그 강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 것을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일 뿐이다. 그런 강물의 장구한 흐름을 관찰한 사람들은 ‘과거’의 요소로 자신을 묶는 데 적극적이지 않다.

탄은 열려 있음의 상징이다. 게다가 그 앞에는 크기를 가늠조차 하기 어려운 바다가 놓여 있지 않은가. 그 점에서 상하이 사람들은 도전의 정신이 강하다. 서광계가 가족을 인솔해 마테오리치를 찾아가 천주에 귀의하고 마침내 그로부터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본을 전수받아 중국인들로 하여금 그전까지 중국이 보지 못했던 수리적 세계의 다른 모습을 보게 만든 것과 같다.

연재를 통해 소개했던 강남과 영남, 그리고 쓰촨 등의 중국 남부 지역은 상하이의 배후지(背後地)이자 문화적 백그라운드에 해당한다. 중국 남부의 기질은 남과 섞이고 어울리는 문화에 익숙한 편이다. 과거의 전통에 자신을 옭아매며 완고한 기질을 보이는 경우와는 다르다. 상하이는 그 점에서 중국의 또 다른 상징이다. 그 상하이가 만들어내는 문화적 토양은 그래서 복합적이다. 개방적이며, 변화에 능동적이다. 실리적이면서도 상상력이 풍부하다. 그래서 상하이가 뿜어내는 열기는 항상 주목거리다.

               
2014-01-22 10:4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