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3화 제왕의 엄혹한 기운이 서린 곳 - 베이징(1)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는 베이징(北京)이다. 한반도의 평양과 비슷한 위도(緯度)에 놓여 있는 이곳은 달리 설명이 필요치 않은 지역인지도 모른다. 한국의 수많은 사람이 다녀왔고, 이제 국력을 키워 바야흐로 지구촌의 슈퍼파워 미국과 어깨를 겨루는 중국의 정치 및 사회 등 모든 분야의 핵심을 이루는 곳이기 때문이다.


베이징의 자금성 중심 건물인 태화전. 고색창연한 베이징의 자금성은 중국 역사 속 황제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한다.


베이징-. 우선 떠오르는 이미지는 드넓은 천안문(天安門) 광장과 고색창연한 자금성(紫禁城), 그리고 만리장성이다. 조선 왕궁의 경복궁에 비해 훨씬 웅장하게 지은 자금성, 그리고 그 앞에 걸린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영웅 마오쩌둥(毛澤東)의 초상, 기이하다 싶을 정도로 크게 지은 인민대회당, 아울러 ‘이 자리에 꼭 이 건축이 들어설 필요가 있었느냐’는 물음을 자아내는 만리장성 등은 베이징의 이미지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다.

앞 회에서 소개한 상하이(上海)가 개방과 진취를 표방하는 곳이라면 이곳 베이징은 엄격한 구획과 질서를 바탕으로 대일통(大一統)의 제왕적 기운을 과시하는 곳이다. 따라서 상하이 식의 자유로움, 개방성은 이곳에서 좀체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구획성에 거대 중국을 끌고 가는 정치적 무게가 더 느껴진다.

이곳은 황제(皇帝)의 도시다. 따라서 베이징의 인물을 거론한다면, 우선 이 곳에서 태어나 방대한 중국을 이끌고 갔던 명(明)대와 청(淸)나라 때의 황제들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아들인 영락제(永樂帝) 주체(朱棣) 뒤로 태어난 모든 명나라 황제, 그리고 산해관(山海關)을 넘어와 베이징을 차지한 뒤 중국을 호령했던 청나라 순치제(順治帝) 뒤의 청 황제 등이 모두 이곳에서 태어났다.


청나라 흥성을 이끌었던 강희제의 초상. 만주족인 그는 현재의 중국 판도를 거의 확정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전의 원(元)나라 황제 여럿도 이 베이징을 출생지로 두고 있으니, 어쨌든 이곳은 황제의 기운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 황제의 기운, 즉 제기(帝氣)는 사람이 뿜어내는 기운 중에 가장 강력하다. 이른바 ‘억조창생(億兆蒼生)’의 생사를 한 손에 쥐고 농락할 수 있으니 그 얼마나 대단할까.

그러나 그런 기운은 그것을 손에 쥔 사람에게는 지고(至高)의 쾌락이요 복락(福樂)일 수 있으나, 그 기운에 눌려 몸을 굽히면서 살아야 했을 사람의 입장에서는 발과 손에 나를 묶어두려 채우는 차꼬와 수갑, 즉 질곡(桎梏)의 다른 이름이었으리라.


엉겅퀴의 고향

누르는 자와 눌리는 자의 이분법적인 구조는 여기서 걷어치우자. 억압의 행위자와 그 피해자라는 단순한 구조에서 베이징을 본다면 우리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방대한 중국의 국토와 그 수많은 인구를 끌고 가는 황제의 통치행위와 그에 딸려 있는 많은 방략(方略)을 읽는 게 우리에게는 더 필요한 일이다.

이곳은 엉겅퀴가 잘 자랐던 곳인가 보다. 베이징의 옛 이름은 꽤 많다. 그러나 처음의 지명은 어쩐지 이 엉겅퀴를 뜻하는 ‘薊(계)’라는 글자로 시작한다. 지금의 베이징 근처에도 이 글자를 사용한 현(縣)이 있지만, 어쨌든 역사 속에서 등장하는 베이징의 첫 이름은 이 글자를 썼다. 그만큼 베이징의 토양에서 잘 자랐던 식생(植生)이었으니 엉겅퀴는 이곳을 대표하는 꽃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엄격함’을 상징하는 꽃 엉겅퀴. 베이징은 이 엉겅퀴의 이름과 함께 역사 무대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그 엉겅퀴의 꽃말은 ‘엄격함’이다. 꽃에 말을 붙이는 관행이야 서양의 발명이겠으나, 어쨌거나 가시가 달린 엉겅퀴는 그런 ‘엄격’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엉겅퀴의 엄격함과 황제의 기운 역시 서로 어울리는 조합이다. 원래 그 엉겅퀴가 제철을 맞아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점을 보고 왕조의 운영자들이 이곳을 황제의 터전으로 잡았으리라고는 보지 않는다.

지정학적인 필요에 의해서 왕조의 수도로 선택을 받은 것이겠으나, 아무튼 이 베이징의 원래 이름은 엉겅퀴와 관련이 있었고, 아울러 그 꽃은 제법 삼엄하다 싶은 이미지를 우리에게 준다는 점도 사실이다. 그렇게 베이징은 원래부터 황제의 엄혹한 통치와 맞아 떨어지는 지역이었던 모양이다.

이 베이징은 공중에서 보면 뚜렷한 축선(軸線)을 가운데 안고 있다. 천안문 광장의 남쪽에는 옛 베이징 성채의 남문(南門)이 있고, 거의 정북(正北) 방향을 따라 마오쩌둥 시신이 놓인 기념관, 광장 한 복판의 인민영웅기념비, 국기 게양대, 마오쩌둥 대형 초상이 걸린 천안문, 오문(午門), 황제의 집무 장소인 태화전(太和殿), 황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왕조 시절 수도의 신민(臣民)들에게 시각을 알려주던 종루(鐘樓)와 고루(鼓樓)가 있다.

자금성 안의 건축들은 모두 옛날 황제만이 거닐 수 있는 황도(皇道) 위에 얹혀 있으며, 그 종루와 고루의 한참 북쪽으로 올라가면 베이징 북녘을 병풍처럼 가로지르는 연산(燕山) 산맥이 있다. 중국의 옛 도성은 남북으로 이어지는 축선을 중심으로 짓는다. 풍수의 관점에서는 북쪽의 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지기(地氣)를 설정하는데, 이 맥이 이른바 ‘용맥(龍脈)’이다.

이를 테면, 베이징의 풍수 상 주산(主山)은 연산산맥이며 저 멀리 곤륜산(崑崙山)으로부터 꿈틀대며 남하하는 용맥은 연산산맥에서 큰 또아리를 틀었다가 곧장 남하해 베이징 자금성으로 이어진다. 그 용맥이 흐르는 곳에 자금성을 비롯한 황제의 상징 일체가 들어선 것이다. 황제의 기운이 바로 이 용맥이며, 이 용맥은 바로 베이징 도시 설계에서의 축선이다. 중국은 이를 ‘中軸線’(중축선)이라고 적는다.


1930년대의 베이징 자금성과 현재 천안문 광장 부근 모습. 남쪽(앞부분)에서 북쪽(뒷부분)으로 뻗어가는 축선을 읽을 수 있다.


이 축선의 개념은 역대 중국 왕조가 들어섰던 도성에는 반드시 등장한다. 베이징에 앞서 더 많은 왕조가 들어섰던 장안(長安 지금의 시안)도 마찬가지며, 낙양(洛陽)도 예외가 아니다. 대부분 장방형(長方形)으로 지어지는 왕조의 도성 한가운데에는 반드시 이 축선이 들어서며, 그 축선은 황제의 상징이자 드넓은 중국 대륙을 이끄는 왕조 통치의 근간으로 작용한다.

베이징의 축선은 약 7.3㎞다. 세계의 대도시에는 나름대로 축선이 있다. 서울의 예를 보더라도, 북악산에서 흘러나온 용맥은 경복궁에 이어져 남대문까지 뻗는다. 그러나 그 길이는 베이징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베이징의 축선은 세계의 여느 도시들이 설정했던 그것보다 훨씬 길고 웅장하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베이징에 앞서 많은 왕조가 들어섰던 지금의 장안(지금의 西安)은 8㎞가 넘는 축선을 자랑했다고 한다.


베이징 도시 계획관에 있는 축선 모형도다.
전통의 축선을 남북으로 연장했으며, 북쪽(뒷부분)을 연장한 축선에 새로 들어선 것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메인스타디움 등이다.

               
2014-01-22 10:4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