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화 호마(胡馬)가 북풍(北風)에 우는 곳 - 산시(山西)(2)

중원의 울타리

중원(中原)은 중국 문명의 새벽에 들어섰던 원래 중국인들의 쉼터이자, 장터이며, 삶의 터전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산시를 비롯해 그 옆의 산시(陝西), 허베이(河北)와 허난(河南) 등을 가리킨다. 이곳에서 춘추전국시대가 막을 열고 닫았으며, 그 이후에 들어선 통일 왕조들은 자신의 세력을 그보다 훨씬 더 키우거나 때로는 줄이면서 중국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했다.

그 중국 문명의 새벽 무렵 이 산시 지역에 들어섰던 왕조는 진(晋)나라다. 종주권(宗主權)을 지닌 주(周)나라 밑에서 제후국 형태로 명맥을 이어갔던 나라다. 이 진나라에서 가장 유명했던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진나라 문공(文公)이다. 그 이름은 중이(重耳)다.


춘추 5패의 한 사람인 진나라 문공. 그는 19년의 국외 유랑을 끝낸 뒤 귀국해 권좌에 오른 인내와 극기의 인물이다.
그의 귀국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화면 앞부분 수레에 탄 사람이 진문공이다.

그는 진나라 세자로 태어났으면서도 왕위에는 한참 뒤에 오르는 인물이다. 정변(政變)이 발생해 부득이 고국을 떠난 뒤 19년 동안 국외로 망명 또는 타국에 얹혀사는 신세로 전전하다가 62세의 나이에 임금의 자리에 올랐으니 말이다.

제법 오랜 기간 타국을 천덕꾸러기 신세로 떠돌았지만 그는 참고 또 참고, 인내하고 또 인내했던 모양이다. 아주 꿋꿋하게 버텼으며, 가끔 방황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역시 의연하게 진나라 세자 출신으로서 언젠가는 고국에 돌아가 왕위를 차지한 뒤 선정을 베푼다는 본연의 의지를 잃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는 한 때 남녘의 초(楚)나라에 머물며 그곳 왕실로부터 신세를 진 적이 있는데, 당시 초나라 왕이 “나중에 그대가 고국에 돌아가 왕위를 차지한다면 지금의 신세를 어떻게 갚을 작정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때 진문공은 “전쟁을 벌여 두 나라 군대가 맞선다면, 우리 쪽이 먼저 90리를 물러나겠다”고 대답했다.

그 후 문공은 진나라 왕위에 오르고, 이런저런 경로를 거쳐 결국 초나라 군대와 전쟁을 벌인다. 진 문공은 초나라 군대에 맞서 싸우기 전 앞서 초나라 왕실에 약속한 대로 90리를 물러난다.

유명한 ‘성복(城濮 지금 山東의 한 지역)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진문공은 약속을 지켰으나 제 실력을 과신하고 깊숙이 들어온 초나라 군대를 물리친다. 이 스토리는 현재까지 ‘퇴피삼사(退避三舍)’라는 성어로 전해진다. 여기서 ‘舍’는 당시의 거리 개념으로 30리를 뜻한다.

진문공은 아주 유명한 중국 역사 속 인물이다. 그는 춘추시대 패권을 차지했던 이른바 다섯 패주, 즉 오패(五覇)의 한 사람이다. 아울러 지금의 중국이 중원 지역을 중심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초기의 과정에서 혁혁한 공로를 쌓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 사람됨의 몇 면목은 이렇다.

곤경에서도 결코 자신의 의지를 접지 않으며, 남들과 맺은 신의(信義)는 끝까지 지키려고 노력하며, 예절과 형식도 중시하지만 실질을 더 따지는 스타일이다. 그는 결국 그런 덕목과 함께 실력을 발휘해 진나라를 춘추시대 으뜸 강국으로 키운다. 그러나 그런 개인적 역량보다 더 주목할 항목이 있다. 진나라가 중국 중심 권력의 울타리 노릇을 했다는 점이다.


춘추시대 판도를 그린 지도. 지금의 허난과 허베이, 산시, 산둥을 중심으로 중원을 형성해
서북의 이민족 침입을 막는 게 당시 중국으로서는 큰 과제였다. 이른바 ‘존왕양이’다.

진 문공을 비롯해 진나라 여러 임금의 치적은 북쪽으로부터 수없이 중원을 치고 내려왔던 이민족을 제대로 막아 중원의 정체성이 장기간에 걸쳐 제 모습을 갖추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이다. 이른바 ‘존왕양이(尊王攘夷)’에 해당하는 업적이다. 여기서 ‘王’은 중원의 구심점이다. 주나라가 미리 형성한 중원의 권력 체계, 나아가 중원 전체의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 요소다. ‘夷’는 북녘의 ‘기러기도 쉬어 넘는 관문’을 통해 들어와 중원의 물자를 약탈하고 인명을 살상했던 유목 제족이다.

춘추시대 다섯 패권자, 즉 오패를 따질 때 이 ‘존왕양이’로써 중원의 정체성을 수호한 군주는 제나라 환공(桓公)과 진나라 문공이 으뜸이다. 나머지 패권자들의 업적은 그저 힘을 모아 춘추시대 시공에서 강력한 힘을 행사했던 게 거의 전부다. 따라서 중국의 정체성에 관한 한 이 두 사람의 업적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겠다.

법가(法家)의 인문적 전통

춘추시대 패권을 잡았던 진나라는 나중에 위(魏)와 조(趙), 한(韓)의 세 나라로 나뉜다. 춘추 이후인 전국시대에 접어들 무렵 생겼던 일이다. 강력했던 진나라가 세 나라로 나눠지니, 산술적으로도 그 힘의 분산은 피치 못할 상황이었을 게다. 그렇지만 이 나뉜 세 나라도 결코 만만치 않은 국력을 쌓아 기르며 전국시대 시공을 누볐다.

인물의 개성을 살펴 그 지역이 지닌 인문적 환경의 이모저모를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상이 바로 조나라의 무령왕(武靈王)이다. 그는 ‘호복기사(胡服騎射)’라는 성어를 낳았던 인물이다. 당시의 중원은 남방의 초나라, 동북지역의 연(燕)나라 등이 세력권에 들어오면서 판도가 크게 넓어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중원의 전통은 강했다.


고대의 북방 유목민족, 그 호(胡)를 묘사한 그림이다. 중원의 제족은 전투에 강한 유목민족의 복장과
기마 기술 등을 모방하는 변혁에 나선다. 그 선두주자가 바로 조나라 무령왕이다.

이른바 ‘오랑캐’로 표현하는 동이(東夷)와 서융(西戎), 북적(北狄)과 남만(南蠻) 등의 이족에 대한 멸시가 여전했다. 그 멸시를 낳았던 문화적 자존심은 주나라 이후 형성된 예제(禮制)가 핵심이었다. 그 예제라는 것은 매우 복잡한 콘텐츠를 담고 있지만, 의복으로 말하자면 소매가 넓은 웃옷에 치마 형태의 하복을 입는 모습이었다.

전쟁을 치를 때도 중원의 전통적 방식인 전차(戰車)가 등장해 규모와 형식 등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스타일이 유행했다. 그러나 중원의 전통은 정착과 농경, 예제와 학문을 논하기에는 적합했을지 몰라도 전쟁에서는 맞지 않았다. 소매 좁은 웃옷에 몸에 붙는 바지를 입고 나타나, 날렵하게 말 한 마리 등잔에 올라탄 채 활을 쏘아대는 북방 유목족의 기병(騎兵)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전국시대에 들어 이런 중원의 전통에 아주 거세게 반기(反旗)를 든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조나라 무령왕이다. 그는 북방 유목족의 기병에 맞서기 위해서는 군대의 복장을 혁신하고, 전법을 전차전 아닌 기병과 보병 위주의 형태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8년에 나온 중국 덩샤오핑(鄧小平) 식의 개혁과 개방에 맞먹는, 당대의 이념적 굴레를 생각할 때 어쩌면 그 이상의 혁신이랄 수 있었다.

무령왕의 개혁은 보란 듯 성공했다. 조나라는 그 덕분에 국력을 신장하고 중원의 강자로 다시 부상할 수 있었다. 우리가 정작 주목할 점은 그의 실질에 관한 중시(重視)다. 형식보다는 실질에 더 무게를 두는 그런 자세 말이다. 춘추시대 진나라가 펼쳤던 문화적 맥락을 우리가 제대로 살피기 위해서는 이 조나라 무령왕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거추장스러운 예복을 벗어버리고 전쟁에서는 역시 전투복으로 갈아입는 현실성, 무엇보다 형식과 겉치레를 따지지 않으며 실질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세가 그의 특징이다. 이는 중국 사상사에서 법가(法家)의 사고에 아주 가까운 형태다. 그런 점에서 조나라 무령왕과 중국의 법가 전통은 같은 맥락을 형성하고 있다.

               
2014-01-22 10:46: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