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화 대일통의 전략가들을 낳은 곳 - 산시(陝西)(1)

“미즈(米脂)의 여인, 쑤이더(綏德)의 남자”라는 말이 있다. 중국어로 적으면 ‘米脂婆姨, 綏德漢’이다. 미녀와 미남을 일컫는 중국 속어다. 이번 회에서 소개할 지역은 중국 산시(陝西)다. 앞에서 소개한 산시(山西)의 서쪽으로 붙어 있는 곳이다. 이 곳 산시에 ‘미즈’와 ‘쑤이더’라는 지명이 있다.


옛 장안이 들어섰던 곳에 세워진 도시 시안의 야경.
역대 11개 왕조가 도읍지로 정했던 곳으로 우리에게는 중국 역사에 관한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하는 곳이다.
<중앙일보 조용철 기자 제공>

이 두 곳이 유명해진 계기는 유비(劉備)와 관우(關羽), 제갈량(諸葛亮)이 등장하는 『삼국지(三國志)』에서 만들어졌다. 초선(貂蟬)과 여포(呂布)가 그 주인공이다. 초선이 미즈 출신이고, 여포가 쑤이더에서 출생했다. 두 사람은 웬만한 한국인이면 대개가 아는 인물이다. 『삼국지』 무대에서 가장 빼어난 미녀가 초선이고, 그와 결혼한 여포는 무예가 출중하며 외모 또한 뛰어난 남성이기 때문이다.

이곳 사람들은 요즘도 “잘 생겼다”는 말을 듣는다. 초선과 여포의 후예들이니 아무래도 그럴 만하다. 미즈라는 곳은 물이 좋다고 한다. 황토 고원의 깊은 계곡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어 수질(水質)이 아주 좋은 물을 마실 수 있는 조건이 미녀를 다량으로 생산해냈다는 분석이다.

쑤이더는 그에 비해 산시 북쪽의 요로(要路)에 놓여 있는 곳이다. 따라서 고래로부터 늘 전쟁이 빗발치듯 닥쳤던 곳이다. 늘 전란에 놓이다보니 이곳 남성들은 그에 대응하며 살아야 했을 것이다. 풍채가 크고, 굳센 의지력과 강인한 기질을 모두 지녔다는 것이다. 그래서 외모가 그럴 듯한 미남자가 많이 나왔다는 얘기다.

삼진(三秦)의 지역

이곳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장안(長安)이 있다. 지금도 ‘수도’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그 ‘장안’이다. 현재는 그 이름이 시안(西安)으로 바뀌었지만, 그 장안이 들어섰던 지역이니 만큼 아무래도 우리의 눈길은 그를 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요즘의 한국인들도 이곳을 부지런히 찾는다.

옛 장안, 그러니까 지금의 시안에는 볼 만한 구경거리가 제법 많다. 당나라 현종(玄宗)이 절세의 미인 양귀비(楊貴妃)와 로맨스를 뿌렸던 화청지(華淸池)를 비롯해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황제들의 거대한 무덤 등이 다 그렇다. 중국 역사의 초기를 장식했던 주(周)나라를 비롯해 모두 11개 왕조의 핵심 터전이 다 이곳에 있었으니 구경거리가 적다고 하면 그만한 거짓말도 없을 것이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가 스며 있는 시안의 화청지 모습.
아직도 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는 곳이다.
<중앙일보 조용철 기자 제공>

아울러 중국인들이 지금까지 자신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황제(黃帝)와 염제(炎帝)의 고향도 이곳이다. 그런 까닭에 중원의 정통성을 늘 상징하고, 아울러 그런 문화터전까지 닦아 현재 중국의 정신적인 토대를 형성했던 주나라까지 이곳에서 출범했으니 중국인들이 산시를 두고 ‘우리의 정체성이 만들어진 곳’이라고 자부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러나 전설이나 신화에 가까운 황제와 염제를 여기서 거론할 생각은 없다. 지금도 그 둘에 관한 상징이나 건축을 만들어 놓고 중국인들은 그들에게 제사를 올리지만, 그들이 실재했다는 확실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황제와 염제에 관한 이야기는 건너 뛰자.

중국의 새벽을 열었던 거친 손길은 누구의 것일까. 아직 그에 관한 정설은 없다. 주나라에 비해 시기적으로 앞섰던 은(殷, 또는 商이라고도 적는다)이 그 주체라고 할 수도 있다. 그 은나라의 주체는 이 산시 지역의 동쪽이거나, 아니면 동북쪽에서 왔다. 산둥(山東)이거나 둥베이(東北)에서 중원으로 진입한 그들의 족적 때문이다.

그 은나라를 패망시킨 뒤 일어선 주나라는 분명 이 산시에서 발원했다. 주나라는 예치(禮治)에 관한 제도의 틀을 확정했고, 춘추전국(BC 770~BC 221년) 시기 내내 중원지역 정치체제의 핵심으로 작용했다. 비록 실제 역량은 없었다 할지라도, 춘추전국 시대 550여 년 동안 중원의 ‘얼굴’로 행세했던 점만은 확실하다.

그 주나라의 이야기도 건너뛰기로 하자. 주나라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등장하고, 낚싯대를 강에 드리웠으나 ‘물고기 속여 낚아 올리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강태공(姜太公)의 이야기도 그냥 넘어가자. 그보다는 이곳을 중국인들이 ‘三秦(삼진)’으로 적는다는 점에 유의하자.


산시는 여러 왕조의 그림자가 교차했으나, 가장 대표적인 문화적 배경을 제공한 왕조는 중국 전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진나라다. 이승의 권력을 저승에까지 지니고 가려했던 진시황, 그가 죽기 전 조성한 병마용의 웅장한 모습이다.
<중앙일보 조용철 기자 제공>

적어도 우리는 이 ‘秦’이라는 글자를 통해 중국의 문명이 처음 통일적인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 이곳은 바로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이뤘던 진시황(秦始皇)의 진나라가 명맥을 이었던 곳이다.

이 진나라 왕실의 유래는 많이 알려져 있다. 산시로부터 서쪽인 지역, 지금은 간쑤(甘肅)라고 하는 곳이다. 이곳의 동남부에 있는 톈수이(天水)라는 곳이 진시황의 할아버지들이 대대로 자리를 잡고 활동했던 곳이다. 따라서 이들은 중원의 족계(族係)라고 볼 수 없다. 중원의 서쪽에 있던 오랑캐, 즉 서융(西戎)으로 불렸던 사람들이다.

‘서쪽 오랑캐’인 서융이 지금의 산시로 진입한 이유 또한 잘 알려져 있다. 춘추시대 주나라가 중원의 중심에 있을 때 그 왕실을 위해 말(馬)을 잘 돌보고 길러준 덕분에 진시황의 할아버지들이 간쑤의 톈수이 인근을 봉지(封地)로 하사 받았다는 설이 있다. 그러니까 진나라 왕실의 먼 조상은 간쑤 톈수이보다 더 서쪽에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아무튼 간쑤의 톈수이를 봉지로 받으면서 진나라 왕실 사람들은 점차 중원을 향해 다가선다. 춘추에 이어 전국시대에 접어들면서 그들은 지금의 산시 지역에 확실히 뿌리를 내리고 이곳을 자신의 터전으로 삼는 데 성공한다.

진시황이 전국시대의 여러 대국을 차례로 쓰러뜨린 뒤 중국 전역을 통일하는 스토리는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다. 그 뒤의 역사도 제법 잘 알려져 있다.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가 등장해 또 다른 실력자 유방(劉邦)과 천하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역사 말이다.

잘 알려져 있듯, 유방은 싸움 초기에 항우의 적수가 아니었다. 병력과 물자 면에서 모두 항우에게 도전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항우는 이곳을 먼저 제 세력으로 끌어안은 뒤에 산시 지역을 삼등분해서 부하 장수 셋에게 분봉(分封)을 하는데, 옛 진나라 땅을 삼등분했다고 해서 ‘三秦’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산시의 땅은 ‘秦’이라는 글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물론 지금도 우리는 시안을 찾아갈 경우 반드시 진시황이 남긴 어마어마한 유물, 진시황 병마용(兵馬俑)을 감상한다. 시안에 비행기로 찾아갈 경우 도착하는 공항은 셴양(咸陽)이라는 곳에 있다. 이 셴양이 바로 진시황이 제국의 수도로 삼았던 곳이다.

그 점에서 이 산시의 기운은 주나라로부터 여러 곡절을 거치면서 진시황에게 내려와 진의 제국 성립으로 인해 찬연한 결실을 맺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전의 역사적 발자취들은 이 진나라의 등장으로 단락을 맺고, 그 이후로는 통일 왕조의 시대가 열린다. 그 과정이야 매우 복잡하고 다단했을지는 몰라도, 우리가 적어도 중국의 문명을 ‘완성체가 이뤄진 시점이 언제냐’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는 진의 등장에 갑절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다.

따라서 우리는 이 대목에서 산시의 정체성이 비록 황제와 염제, 그 뒤를 잇는 주나라의 전통과 불가분의 관계이긴 하지만 역시 진이라는 제국이 이 땅에서 흥기해 이후의 통일 왕조 시대를 열었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2014-01-22 10:4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