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1화 대일통의 전략가들을 낳은 곳 - 산시(陝西)(2)

‘중국’이라는 문명을 생각게 하다

중국의 기본적인 컨셉트는 융합이다. 섞이고 섞이다가 때로는 그 상황이 뒤죽박죽으로 흐르기도 하지만, 마침내는 큰 흐름으로 한 데 또 섞인다. 융합이라는 말이 그에 어울리는 단어일 테고, 혼융(混融)이라는 단어도 그에 잘 어울린다. 그 섞임의 미학이 진나라라는 최초의 통일제국이 등장한 이 산시 땅에서도 예외일 리는 없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초상.

황제와 염제가 실존한 인물이라면 이들은 산시가 고향일 확률이 높다. 그 뒤를 이었다는 주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이 나라는 춘추전국 시대 줄곧 이 산시와 남쪽의 허난(河南)을 오갔으나, 그래도 원산지를 따지자면 역시 산시다. 춘추전국의 혼란기를 마감하고 역사 무대에 첫 통일 제국을 세운 진나라는 연원이 앞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서쪽이다.

서쪽의 오랑캐, 즉 서융으로 치부되며 멸시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던 진나라가 차츰 동진(東進)을 시작해 결국에는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세웠다는 점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 뒤에 들어선 이는 유방이다. 그는 한(漢)나라를 세워 중국의 문명적 토대를 매우 확고하게 다진 인물이다.

이른바 한고조(漢高祖)라고도 불리는 유방은 어느 곳 인물일까. 우리 한국인들의 대다수가 그냥 지나치는 대목이지만, 유방은 중원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지금의 중국 판도에서는 한족(漢族)일 수 있으나, 2500여 년 전 춘추전국의 시공(時空)에서는 조금 달리 볼 인물이다. 그는 중원의 정통성과는 거리가 멀었던 남부의 초(楚)나라를 고향으로 둔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정체성은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남쪽의 오랑캐, 즉 남만(南蠻)에 속한다.

유방과 천하의 패권을 다퉜던 항우 또한 초나라 사람이다. 한 왕실에 이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던 혼란의 시기는 삼국시대와 서진(西晋) 및 동진(東晋), 나아가 북방에서 이주해 온 이민족 통치의 시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을 거친다. 그 뒤를 이은 수(隋)와 당(唐)은 산시의 장안에 뿌리를 내리면서 견고하게 중국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오호십육국에 이어 등장한 수와 당은 선비(鮮卑)라는 이민족의 피를 물려받은 족보를 지니고 있다. 산시의 정치적 핵심인 장안은 당나라에 접어들어 세계 최대의 제국 도시로서 영화를 누리다가 당의 몰락과 함께 그 성세(盛世)를 마감한다.

산시는 당의 몰락 이후 그 때 만큼의 전성기를 구가한 적이 없다. 그러나 산시는 진시황의 통일 제국 이래 당나라까지 중국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셈이다. 원래 중원의 구심점이었던 주나라, 서쪽으로부터 동진해 온 진나라, 남쪽에서 치고 올라간 유방과 항우의 초나라 세력, 이어 북방의 혼란기를 마감하고 진시황 때의 규모를 넘어서 중국의 극성기를 열었던 동북지역 선비족의 수와 당나라….


역대 중국의 최고 미인을 꼽으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먼저 떠올리는 대상이 당나라 양귀비다.
양귀비의 모습을 상상하면 이렇다는데…. 그 또한 산시를 배경으로 활동했던 사람의 하나다. <중앙일보 조용철 기자 제공>

산시는 이 모든 세력이 피바람을 뿜어내며 천하의 권력을 노렸던 곳이다. 그 과정이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인명의 희생을 바탕으로 삼고 있지만, 어쨌든 진시황의 통일 이후 수와 당나라까지 내려오면서 산시는 ‘중국’이라는 어엿한 정체성을 만들어 냈다.

이는 이질적인 요소가 한 데 뭉치는 매우 역동적인 과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말도 달랐을 테고, 복장도 서로 닮지 않았으며, 문화적 바탕이 달라 툭하면 시비가 벌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체(政體)를 형성해 천하의 권력을 탐하는 자리를 두고서는 ‘너 죽고 나 살기’식의 피비린내 진동하는 싸움이 번지지 않을 수 없었을 일이고, 그렇다면 이곳은 생지옥을 방불케 하는 격전장이 아니었을 수 없다.


선비와 서적들을 파묻거나 불에 태웠다는 진시황의 분서갱유 상상도.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되새길 때, 왜 문화적 전통까지 모두 말살하는 정책을 그가 펼쳤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어떤 이는 “진시황이 원래 중원의 문화바탕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렇게까지 했을 리 없다”고 말한다. 권력을 두고 전쟁이 벌어졌을 때, 상대가 자신과는 다른 이족(異族)이라면 그 증오와 멸시는 극에 달하기 마련이다.

‘서쪽 오랑캐’ 출신인 진시황이 그 경우일지 모른다. 그는 이족 출신으로서 중원에 들어와 패권을 잡은 인물이다. 그가 종족적인 편견에 휩싸였다는 가정은 나름대로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분서와 갱유는 그 전까지 존재했던 중원의 문화와 문물을 없애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추정에 불과하지만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또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그럴 수도 있다는 얘기다. 융합과 혼융이 결국은 ‘한 데 뭉침’을 전제로 벌어지는 역사의 과정일 것인데, 그 안에는 이질적인 요소가 한 데 어울리며 벌어지는 분열과 반목, 나아가 심각한 살생이 따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과정은 큰 흐름을 이루면서 중국의 역사 전반에 등장한다. 그 초기의 길목을 놓은 사람은 누구일까. 어떤 이들이 이런 통합의 거친 과정을 설계했을까. 원래부터 그렇게 융합하도록 짜인 것은 아닐까. 뭐 이런 의문들이 줄을 이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 볼 필요가 있다.

중국 문명의 아침이 펼쳐질 무렵에 그런 설계자들이 등장한다. 황제와 염제의 전설이 이곳저곳을 떠다니고, 주나라 왕실의 전통이 그대로 숨을 쉬며, 진시황이 제국의 꿈을 실현했으며, 남부 초나라 세력의 인물들이 천하의 패권을 잡았던 바로 이 산시의 땅에서다.

               
2014-01-22 10:47:53